장하준 교수 “밖에선 인기 있는 나라, 왜 안에선 ‘불행’ 말하는지 그것부터 풀어야”[한국의 오늘을 말하다]
노동시간·자살률 등 모두 국민 불행하단 얘기, 성장률 오르면 오래 살고 연탄 한 장 더 때던 때 지나…국민 행복을 경제 목표로 삼아야
전체 경제 보면 내 지출이 다른 사람의 수입…정부가 ‘자린고비 경제’ 벗어나 돈 쓰면 재정은 적자 나도 경기 회복될 수 있어
단기 주주의 힘이 세지면 기업이 말라죽어, 장기 투자하기보다 배당 늘리고 주주들 붙잡는 데 초점 맞춰
지금 미·중 경제는 샴쌍둥이처럼 연결, 세계화·신자유주의 후퇴 가능성 낮아…한국이 ‘줄타기’ 잘해야
장하준 런던대 교수(60)는 “밖에서는 한국이 굉장히 멋있고 잘사는 나라, 인기 있는 나라가 됐는데 왜 한국에 사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는지 풀어야 한다”고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고, 아카데미상을 받는 영화를 만드는 나라에서 저출생, 노인빈곤율, 자살률, 1인당 노동시간과 같은 지표가 왜 세계에서 가장 나쁜 편에 속하는지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여전히 국가 경제의 기반은 제조업에 있다고 보고, 최근 금융과 실물이 괴리되어 움직이는 양상을 지적하면서 “단기주주의 힘이 너무 세지면 기업이 말라죽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전작에 비해 대중이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책은 중학생 정도 수준이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경제학은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 경제가 발달하는 방식,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우리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죠.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경제학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 이번 책에서 ‘기회의 평등’만으로 충분치 않고 ‘결과의 평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봐야 하나요.
“지난 30~40년 동안 세계를 풍미해온 시장주의에서는 기회의 평등만 있으면 그 후의 결과는 불공평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건 공정한 경쟁이 아니죠.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기본적 능력이 같은 상태에서 출발선에 서야 합니다. 형식적인 평등함과 진정한 기회의 평등이 또 다르니까요. 한국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상당히 계층 상승이 쉬운 나라였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도 정주영 회장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나라였죠.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서 좋은 집안에 태어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고, 금수저·흙수저 얘기도 나온 지 오래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평등할지 모르지만 불평등한 경쟁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들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분노에 찰 수밖에 없는 거죠. 요즘 젊은이들이 주식, 코인에 열을 올리는 것도 저는 이해합니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획기적으로 바꿀 방법이 없으니까요.”
- 이번 정부는 법인세 등의 감세와 재정 긴축 기조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경제정책 기조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감세를 통해 기업 활동을 진작한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근거가 없는 얘기입니다. 기업이 활동하는 데 세율이라는 것은 2차적인 문제예요. 노동자, 과학기술 기반, 치안, 정부 서비스 등 여러 가지 가성비를 따져서 선택하는 거죠. 부자 감세를 한다면서 동시에 긴축을 하자고 하면 어디서부터 깎겠습니까. 결국 복지, 교육 이런 분야부터 줄일 텐데 이것은 맞지 않는 방향입니다. 제가 7~8년 전 한국 정부의 재정정책 방향을 비판하면서 ‘자린고비 경제학’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요. 한국은 여전히 정부 재정이 건전한 나라에 속합니다. 정부의 재정을 가계 살림처럼 생각해서도 안 되죠. 나라 전체 경제를 생각해보면 내 지출이 다른 사람의 수입이 됩니다. 내가 수입이 줄어서 각종 지출을 줄이면 관련된 사람들의 수입이 줄면서 다 같이 내려가게 된단 말이에요. 하지만 케인스가 말한 것처럼 그럴 때 정부가 나서서 돈을 쓰면 정부 재정은 적자가 나겠지만 경기가 회복되고, 그에 따라 다시 세수가 늘어날 수 있죠.”
- 한국 정부가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목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무엇보다 지금 밖에서는 한국을 굉장히 멋있고 잘사는 나라, 인기 있는 나라라고 보는데 정작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왜 불행한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야 됩니다. 1인당 노동시간, 자살률, 노인빈곤율, 저출생 등의 문제 모두 국민이 불행하다는 얘기죠. 경제의 목표는 무엇보다 국민들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돼야 합니다. 경제성장률이 얼마나 늘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국민들이 행복하고 의미있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1인당 국민소득 2000~3000달러 수준일 때는 성장이 진짜 중요했습니다. 그때는 성장률이 오르면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어린이들이 죽지 않아도 되고, 추울 때 연탄 한 장을 더 땔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정부 사람들은 여전히 1970~1980년대 사고에 묶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기준을 바꿔야죠. 저는 결국 복지제도를 잘 만들고, 생산성을 높이되 노동시간을 줄이고, 또 공공 소비를 늘리는 방식으로 경제정책의 방향을 전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중은 지난해 기준 14.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21%)에 크게 못 미치고 있어요.”
- ‘제조업이 중요하다’ ‘주주들의 권한은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는데요. 최근의 경향과는 반대되는 주장으로 들립니다.
“제조업의 중요성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관광이나 은행 산업으로 상징되는 스위스가 실제로는 1인당 제조업 생산량 1위 국가입니다. 공산품을 경쟁적인 가격과 품질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한 나라의 생활 수준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에요. 서비스업 대부분도 제조업에 기대서 발전하는 것들이고요. 한국이나 독일은 아직 제조업이 강한 나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최근 단기주주들의 힘이 너무 세지는 걸 저는 큰 문제로 생각합니다. 여러 나라가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복잡한 투자상품도 많아지면서 투자자들의 참을성이 없어진 겁니다. 기업들이 유보이윤을 통해 장기적 안목에서 투자를 하기보다는 배당을 늘리고, 주주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코리아 디스카운트’라고 한다면 저는 그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웃음). 단기주주들의 힘이 너무 세지면 기업이 말라죽을 수 있거든요. 장기 보유자를 우대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저금리 정책과 고물가 현상이 나타나고, 고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의 여파로 전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금리 기조는 코로나 때 시작된 게 아니라 2008년 금융위기 때로 거슬러 가서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경제·금융 시스템과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 비실비실한 경제를 돈으로 틀어막은 대가라고 봐야죠. 1929년 대공황 당시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서 인프라 투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제도개혁이었습니다. 투자은행·상업은행 분리, 증권거래위원회(SEC) 신설, 예금보험·사회보장 제도 도입 등을 한 게 그때거든요. 그런데 2008년 위기 때는 은행들 자기자본비율 올리고 정말 이상한 파생상품 규제하는 정도만 한 거예요. 2008년 위기 후의 회복세라는 건 낮은 이자율과 양적 완화가 떠받치고 있는 것이죠.”
-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로 다시 금융 불안 우려가 높아졌습니다.
“중앙은행의 0% 이자율이란 것은 자본주의 기본 질서를 부정하는 겁니다. 시장에서 제일 중요한 게 가격인데 가격이 없어진 것이니까요. 자본시장에서 투자 프로젝트를 선별하는 기능이 사라지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자율이 제로였을 때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5~6%로 높아지면 이제 그만큼 수익을 내지 못하면 망하는 곳들이 속출하게 됩니다. 괜찮아 보였던 자산이 사방에서 부실자산이 되기 시작하는 거죠. 미국 실리콘밸리은행도 이론적으로는 제일 안전하다는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자율이 확 오르니까 채권 가격이 떨어지고 은행 부실로 이어진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묻혀 있는 상태라고 보고 있습니다.”
- 미·중 갈등을 기폭제로 세계화·신자유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을 주생산기지로 하는 국제적 공급망은 중국이 개방 노선을 채택한 1980년대 말부터 거의 40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이걸 재조직할 수 없습니다.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도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닙니다. 공장만 옮겨서 되는 게 아니라 노동자도 있어야 하고, 엔지니어 같은 인력을 교육해 배출할 산학협력 기반도 있어야 하죠. 또 납품업체도 있어야 하고요. 저는 그래서 ‘미·소 냉전’과 ‘미·중 대립’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냉전 당시에는 두 진영 사이에 무역이랄 것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미국과 중국 경제는 거의 샴쌍둥이처럼 연결돼 있는 형국입니다. 중국은 미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고, 미국이 오랜 기간 임금을 크게 올리지 않고 경제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싼값에 소비재를 수입해왔기 때문에 물가가 크게 오르지 않았던 덕분이죠. 저는 그래서 미국이 군사패권과 직접 관련된 반도체 같은 분야에서는 중국을 막으려 하겠지만, 전 세계 공급망 자체를 다시 10~20년에 걸쳐 조직할 의도는 없다고 봅니다.”
- 반도체를 주력 산업으로 하는 한국의 경우는 어떻게 보면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에 놓이기도 하는데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줄타기를 잘해야 되는 나라예요. 묘하게 줄타기하면서 얻을 것은 얻고 줄 건 주고 해야 되는데 지금 정부는 미국 쪽에 확실히 서자, 그런 태도를 보이고 있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고 나왔는데 일본과 우리는 구조적으로 이해관계가 다릅니다.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세계에서도 높은 나라에 속하는 반면 일본은 내수 시장이 크고 기술 자립을 강조했기 때문에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요. 극단적인 경우 일본은 맘먹으면 ‘중국과는 같이하지 않겠다’ 할 수도 있는 나라지만 한국은 그게 안 되거든요.”
- 앞선 책에선 크게 언급하지 않았던 ‘무보수 돌봄노동’의 문제도 지적했습니다.
“GDP의 가장 큰 문제는 극도의 ‘자본주의적’ 관점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며, 가사를 하는 무보수 돌봄노동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그 중요성이 부각됐지만, 여전히 경제학적으로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사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했을 때 전체 GDP의 30~40% 정도일 것으로 추산됩니다. 결국 돌봄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을 깨고, 복지체제의 변화를 통해 소득과 관계없이 모두가 필요한 돌봄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장하준은 누구
1963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케임브리지대에 임용돼 경제학 교수로 근무했으며, 2022년부터는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년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군나르 뮈르달’상을 받았고,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바실리 레온티예프’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1980년대 이후 신고전파 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으로 자리 잡은 뒤 시장 만능주의가 가져온 문제점을 비판해왔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쾌도난마 한국경제> <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등 17권의 책을 썼다.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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