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밑바닥서 사는 홍어, 민초와 닮아 … 생명·의지력 담았죠”

김용출 2023. 4. 18.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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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홍어’ 출간한 문순태 작가
냄새나고 흉하다며 비하하는 모습 충격
슬픔·분노 느껴… 극복 의지 시로 승화
홍어 요리·생태·관련된 인간의 삶 등
다양한 통찰 담아… 음식시학의 절창
“전라·경상·충청도 사람들 기질 달라도
홍어 삼합처럼 조화 이루면 꽃필 수 있어
시 쓸수록 나와 동일시… 홍어 꿈이 내 꿈”

팬데믹이 한창이던 몇 해 전, 한동안 서울의 아들 집에 묵게 됐다. 외출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머물러야 했다. 홍어가 먹고 싶었다. 영산포 출신의 아내는 홍어 요리를 만류했다. 서울 사람들은 홍어를 싫어한다고. 냄새가 밖으로 나가면 당장 위층에서 난리가 날 것이라고.

홍어탕을 끓였다. 냄새가 행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아파트 창문을 꽁꽁 닫고, 부엌의 커튼까지 치고, 환풍기까지 돌려가면서. 보글보글 끓으면서 냄새가 아파트 안에 차오르자, 혹시 현관의 초인종이 울리지 않을까 심장이 쫄깃해졌다. 알 수 없는 위축감. 옛날에는 이런 생각 없이 그냥 먹기만 했는데….
중견 작가 문순태가 다양한 홍어 요리는 물론, 생태나 역사 등 홍어를 소재로 시 100편을 묶은 시집을 펴냈다. 그는 “홍어에 대한 비하가 상처가 됐는데, 원한 감정이 아닌 시를 써서 의지력, 생명력으로 극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980년 이후 전라도 사람들과 함께 홍어가 비하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냄새나고, 보기 흉하다고. 전라도 사람들 역시 홍어와 함께 비하되는 느낌이었다.

담양 출신의 작가 문순태는 어떤 슬픔이 감각되기도 했고, 분노 같은 감정도 차올랐다. 단순히 홍어를 먹는 데서 끝내선 안 되겠구나. 어떤 극복의 의지로써 홍어를 써야겠구나. 생각이 점점 부풀어 올랐고,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홍어가 우리 인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홍어는 부레가 없는 물고기여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살잖아요. 우리 민초들 역시 기를 펴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서 사니까요. 홍어가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라고 하는 새로운 인식과 관점을 가지면서 시로 쓰게 된 거죠.”

문순태는 3년 전부터 홍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내와 홍어 요리를 하나씩 해 먹어가면서 느낌이나 감상 같은 것을 기록했다. 120여 편의 시가 모였고, 이 가운데 100편을 추려서 시집 ‘홍어’(문학들)를 출간했다.
시집에는 살, 무침, 탕, 전, 튀김, 찜, 삼합, 라면탕 등 다양한 홍어 요리는 물론, 홍어의 생태나, 홍어와 연관된 인간의 삶과 역사 등 홍어를 매개로 다양한 통찰이 담겨 있다. 가히 음식시학의 절창이라 할 만하다.

오랫동안 주로 소설을 써온 중견 작가 문순태는 왜 ‘홍어’ 시집을 써야 했을까. 그는 홍어에서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문 작가를 지난 13일 왕복 천 리 길을 넘게 달려서 담양 생오지 집필실에서 마주했다.

홍어는 대표적인 남도 음식이지만, 지금은 전 국민이 즐기는 음식. 전라도를 벗어나서 가장 많은 사람이 즐기는 홍어 요리는 삼겹살과 묵은 김치와 함께 먹는 홍어 삼합 요리다.

“가슴 후비는 어울림의 한 판이자/ 입안에 꽉 찬, 이 야만적인 충만감/ 머릿속에 일곱 빛깔 무지개 떠올랐다/ 묵은 김치에 잘 삭은 홍어와/ 기름진 돼지고기 수육 포개 얹으니/ 절묘한 조합으로 폭발하는구나/ 시큼하고 기름지고 알싸한 맛에/ 코에서는 수천 마리 벌떼가 날고/ 입안에서 요지경 속 떼춤을 춘다/ 다른 것들이라도 셋만 잘 어울리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화음이 잘 맞는 재즈 보컬 트리오 맛”(’홍어 삼합’ 전문)

―벌떼가 날다니. 왜 홍어 삼합이 인기일까.

“홍어 자체만으로도 맛이 있지만,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홍어만으론 즐길 수가 없다. 홍어를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삼합이다. 아이들도 잘 먹는다. 아울러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울려서 이루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다 다르지만 조화를 잘 이루면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다.”

홍어 요리는 냄새, 아니 향기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냄새인가 향기인가3’은 홍어 향기가 나이와 사람에 따라서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재미있게 그린 시편.

“어린 시절 홍어 처음 먹었을 때/ 방귀 냄새에 문 박차고 뛰쳐나갔고/ 소년 시절에 시궁창 냄새에/ 손바닥으로 코를 쥐어 막았고/ 장가가던 첫날밤엔/ 잘 익은 수밀도 냄새에/ 왈칵 눈물이 벅차올랐다/ 막걸리 안주로 먹을 때 찔레꽃 향기/ 소주와 먹을 때 톡 쏘는 장미향/ 맥주와 먹을 때 달달한 밤꽃 향기/ 늙은 친구들과 먹을 때/ 은근한 살 냄새로 변했다/ 냄새가 향기 되기까지 20년,/ 향기가 사람 냄새 되기까지/ 50년이나 걸렸다/ 산수를 넘긴 지금은/ 오래 살아 달빛에 하얗게 바랜/ 그리운 사람의 마음 향기”(‘냄새인가 향기인가3’ 전체)

―홍어 냄새가 정말 향기로, 다시 마음의 향기로 바뀌었는가.

“홍어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은 냄새가 아니라 향기로 받아들인다. 저 역시 냄새가 아닌 향기로 받아들인다. 냄새는 좋은 것과 안 좋은 것 모두 포함하지만, 향기는 좋은 것만 있다. 나쁜 향기란 없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지금은 홍어에서 사람 냄새를 느낀다. 인간의 본질적인 냄새가 바로 살 냄새다.”

홍어 요리와 생태, 문화와 역사를 더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홍어가 된 착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은 홍어의 꿈까지 꿀지도.

“내가 가고 있는 낯선 이 길/ 언제쯤 어둠의 끝이 보일까/ 지금 고향 바다 떠난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터/ 미지의 힘에 끌려, 끝도 없이/ 가라앉는 무력감과 함께/ 사라져 가는 희미한 그림자여/ 날개 있어도 날지 못하고/ 죽어서는 항아리 속에서 삭아/ 불꽃 같은 향기로 피어올랐고/ 온몸 꽃잎처럼 약해 저며졌다/이 슬픈 운명, 거부할 수 있다면/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이승 떠난 뒤 누가 나를 위해/ 진혼가 불러준다면/ 죽어서도 바다 꿈꿀 수 있으련만”(‘홍어의 노래’ 전문)

―홍어의 마음으로 홍어를 노래했는데.

“홍어 시를 쓰면서 어떻게 보면 제가 홍어 같고 홍어가 저 같은 동일화를 자주 느꼈다. 홍어의 모습을 보면 늙고 추한 제 모습을 보는 것 같고. 또 한 보름 동안 항아리 속에 갇혀 삭히는 과정이나 미학이, 새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사회를 접하면서 자아가 조금씩 변하는 제 삶과 비슷한 것 같다. 홍어와 제가 동일시되면서 홍어의 꿈이 이제 제 꿈이 된다.”

1939년 담양에서 태어난 문순태는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천재들’로 추천받고,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백제의 미소’가 당선돼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피아골’, ‘철쭉제’, ‘징소리’, ‘된장’, ‘생오지 뜸부기’ 등을, 시집 ‘생오지에 누워’, ‘생오지 생각’ 등을 펴냈다.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전9권)을 펴냈다. 한국소설문학작품상, 문학세계작가상, 이상문학상 특별상, 요산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송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문순태는 잘 삭힌 홍어처럼 백발을 휘날리며 서울에서 달려온 기자에게 문학과 삶을 진솔하게 들려줬다. 정감 있고 다정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하나를 물으면 둘, 셋을. 그의 이야기가 한창 문학과 삶으로 내달릴 때, 앰프를 통해서 동네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민 여러분, 날이 매우 건조합니다. 화재가 쉽게 발생할 수 있으니 불이 나지 않도록 모두 화재 관리에 철저를 기해 주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기자는 물었고 그는 이야기보따리를 친절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웹소설 도래와 순문학의 위기, 새로운 독서 모임, 존엄한 죽음까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살지 말고 살 때까지만 살자고 한 그 말이 딱 오더라고.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만 살자 그 말이에요….

담양=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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