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성찰과 모색으로 ‘연대의 힘’ 새롭게 곧추세워야
“커졌지만, 그만큼 힘이 없다”, “많아졌지만, 각자도생. 연결이 약하다”,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지속 가능할지 고민이다”, “일은 많아졌지만 해결은 쉽지 않다”, “사업만 보이고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21년 창립 20돌을 맞은 시민단체연대회의 토론회에서 나온 목소리들은 오늘날 시민단체들이 맞닥뜨린 상황을 응축해 드러낸다. (…) 비전 재정립과 의제 발굴, 조직혁신 등 풀어나가야 할 과제 또한 만만찮다.
지난 3월7일 포근하고 따뜻한 봄날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 공공그라운드(옛 샘터 사옥). 유서 깊은 붉은 벽돌 건물의 지하공간(001스테이지)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더니 어느새 가득 찼다. 발표와 모둠토론이 3시간 동안 이어졌다. 공공상생연대기금과 사무금융우분투재단 등 5개 공익재단이 공동 주최한 노동-시민사회연대, 약칭 ‘솔라시’(Sollaci, Solidarity of Labor and Civic Society)의 ‘여는 포럼’ 자리였다.
‘연대로 스며들다’란 제목으로 진행된 포럼은 이들 재단이 “우리 사회의 날로 심각해지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해 추진해 온” 기획의 첫 공개 행사였다. 단체 활동가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2023년 현재 시민단체 등이 처한 현주소를 함께 살피고, 무엇보다 ‘연결되지 못한 무너진 연대’를 어떻게 새롭게 곧추세울 것인가를 놓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시민단체들은 실상 민주화 전후 많은 의제와 사안에서 서로 손을 맞잡아왔다. 지금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비롯한 크고 작은 연대체를 꾸려 함께 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정당들이 정책정당으로서 역할을 거의 못하는 상황에서, 시민단체들은 다양한 정책 분야에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때로는 법안을 직접 디자인하고 제안하기도 한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단기적이나 포괄적인 연대세력을 형성해 여론을 동원함으로써 정책 결정라인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김영순 서울과학기술대 교수)했다. 돈(재정)과 사람(조직)이 적은 시민단체들이 우리 사회 정책생태계와 복지정치의 장(Field)에서 적극적인 정책행위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동력은 이렇듯 ‘연대의 힘’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조직적 연결망이 이완되고 특히 연결의 구심적 역할을 하던 몇몇 큰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여러 이유로 약화했다. 여기에 디지털 전환과 기후위기 등 변화 속에서 ‘구조변동’이 일어난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런 흐름을 ‘약화의 시선’으로만 보는 진단은 구조변동의 일면만 바라보는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상대적으로 큰 시민단체 영향력이 위축된 건 사실이지만, 숱한 비영리단체, 협동조합, 주민자치단체,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등 이전과 다른 ‘이질적 결사체’들이 속속 생겼다. 근년에는 청년, 페미니즘, 기후운동 등 사회운동의 새 흐름이 강화하면서 양적으로는 오히려 성장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기존 단체들의 영향력과 위상 축소라는 흐름의 다른 한편에는 새로운 주체의 잇따른 등장으로 시민사회의 다원적 구조가 형성되는 흐름이 있다는 판단이다.
시민사회와 정부∙기업의 관계 변화도 눈에 띈다. 중앙이나 지방정부가 마련한 여러 정책 결정 및 심의과정에 주기적으로 참여하거나, 이들이 투자한 프로젝트나 사업에 참여하는 이른바 ‘협력적 거버넌스’가 제도화하거나 퍼졌기 때문이다. 이는 시민사회 진영의 정책 개입 참여 확대란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정부 정책 결정에 들러리 서기, 재정의 정부 종속화와 관료화 등 문제를 낳기도 했다.
안타까운 대목은 이런 구조변동 속에서 많은 단체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분산되거나 연대의 힘이 약해진 점이다. 연결과 연대를 조직할 구심점이 되는 시민사회의 리더십 또한 부재했다.
“커졌지만, 그만큼 힘이 없다”, “많아졌지만, 각자도생. 연결이 약하다”,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지속 가능할지 고민이다”, “일은 많아졌지만 해결은 쉽지 않다”, “사업만 보이고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21년 창립 20돌을 맞은 시민단체연대회의 토론회에서 나온 목소리들은 오늘날 시민단체들이 맞닥뜨린 상황을 응축해 드러낸다. 재정 부족과 조직 내부의 세대 및 노선 갈등, 낮은 시민 신뢰도, 정체성 혼란, ‘외압’ 등 문제도 있고, 비전 재정립과 의제 발굴, 조직혁신 등 풀어나가야 할 과제 또한 만만찮다.
정치적 양극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연대가 “자기 진영을 모으기 위해 적을 더 선명하게 만들고 적개심을 더 예리하게 벼리기 위한 적대로 변모”(조건준 아무나유니온 대표)한 게 문제라는 진단도 나온다. “이견을 가진 집단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을 극복할 상대가 아니라 없애야 할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냉대”를 키워온 결과다.
시민단체 안팎에서 ‘성찰’과 ‘새로운 연대의 모색’이 핵심 화두로 떠오르는 배경에는 이런 상황 인식과 진단이 있다. 솔라시 기획도 같은 맥락에서다. 솔라시는 정례적인 범시민사회 연대 축제 개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 사이 경계와 장벽을 낮춰 상호신뢰를 축적하는 게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시민단체의 “새로운 변곡점”(정한울 박사)을 맞아 연대의 질적 전환을 모색하는 또 다른 움직임도 있다. ‘논쟁과 대안(가칭) 프로젝트’가 그중 하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회장을 역임한 백승헌 변호사, 정치개혁공동행동 집행위원장을 지낸 박정은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민주주의를 혁신하자는 활동가들의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김연수 이사, 손우정 솔라시 추진단장(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주도하는 이 ‘초동 모임’은 시민단체의 새로운 공론장 구성을 논의하고 있다. 하여 ‘논쟁과 대안’이 진보적 시민단체를 하나로 모으는 큰 공론장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손우정 연구위원은 “이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표는 느슨하더라도 시민이 주도하는 대안 공론장을 통해 시민사회 공동의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의 새로운 연대는 몇몇 소수가 나서거나 그럴듯한 무대가 꾸며진다고 이뤄지지는 않는다. 기존 연대체에 관한 비판적 인식은 물론 무엇보다 각 개별단체의 성찰과 내부 혁신이 이뤄질 때야 외부의 호응도, 탄탄한 연대의 길도 열릴 것이다. 달라진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는 “활동가 정책역량과 전문성 강화가 필수”(정상호 서원대 교수)다.
내년 30돌을 맞는 참여연대는 최근 미래비전위원회와 지속가능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지난 30년의 성과와 한계를 성찰하고, 질적 전환을 위한 새 비전을 정립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말 새로 집행부를 꾸린 경실련도 새로운 연대 모색과 함께 의제제기자로서 혁신에 나선다. 박상인 상임집행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은 “양극화와 탄소중립이란 두 의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거제도 개편에 역량을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의힘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뒤 지난 20여년간 유지됐던 민관거버넌스인 ‘시민사회위원회’가 중단되고, 서울시와 충남도 등에서는 협치가 중단되거나 파행되는 등 거친 ‘외압’과 ‘퇴행’으로 정책이 뒤집히고 있다. 하지만 시민단체의 역사와 역할을 부정하려는 정치권력의 힘이 셀수록 “공동체적 삶의 토대이자 민주주의 발전의 동력으로서 시민단체의 역할이 필요로 하는”(김소연 사단법인 시민 연구위원) 정도 또한 커진다. 시민단체가 그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는가는 어떻게 ‘연대의 힘’을 새롭게 곧추세우느냐에 달려 있다.
이필구 한국마을지원센터연합 이사장은 ‘벽을 밀치면 문이 되고,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는 미국 사회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의 말을 인용하며 “벽 너머를 상상하는 것으로 (새로운 연대가)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그 첫발은 “지난 30여년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어떻게 지속하고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30년 차 상근활동가인 이태호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은 “저항을 위한 연대뿐만 아니라 공감과 협동에 기초한 다양성의 연대, 시민주도 살림의 연대를 만들어갈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참고자료: <촛불 이후 사회운동의 과제 및 전망>(김귀옥, 이태호 외, 선인>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겨레> 편집국에서 기동취재팀장과 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등을 거쳤고,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영국 편>,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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