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덕신하우징 회장 "이 정도면 되겠지 만족해선 안돼···사업가는 죽기살기로 덤벼야죠"
막노동 전전하던 무일푼 '흙수저' 출신
철강재 유통회사 잡부서 영업사원 발탁
영양실조까지 걸려가며 창업자금 마련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 신뢰 쌓으며
데크플레이트 후발주자서 업계 1위로
폐업위기 겪었지만 끈기·뚝심으로 극복
글로벌 기업 목표···가족 승계는 않겠다
김명환(73·사진) 덕신하우징(090410) 회장은 ‘흙수저 신화’의 주인공이다. 1951년 충남 홍성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그다지 유복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일손이 부족했던 탓에 부모님은 그를 농부로 키우길 원했다. 중학교 진학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성인이 됐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군 입대 후 월급이 더 나온다는 말에 베트남 전쟁 파병까지 자원했던 그였다. 사회 생활 첫 시작도 막노동판이었다. 벽돌 나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철강재 유통 회사의 영업사원이 됐고 거기서부터 성공 스토리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더 큰 꿈을 위해 직접 회사를 차렸고 각고의 노력 끝에 연매출 2000억 원의 데크플레이트(거푸집을 대체하는 건축용 자재) 1위 기업으로 키워냈다. 가진 것 하나 없던 청년이 중견기업 회장으로 올라선 인생 역전 스토리다. 온몸을 바쳐 키운 회사는 이제 40년을 넘었고 창업주는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있다. 덕신하우징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시켜야 한다는 과제와 창업주가 없어도 회사가 온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는 게 그것이다. 서울경제신문은 18일 서울 목동 사옥에서 김 회장을 만나 그의 사업 이야기와 성공에 대한 철학,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신뢰·신용으로 써내려간 성공 스토리
김 회장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뢰와 신용이다. 사명(덕신하우징)에 믿음(信)이 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자신의 ‘인생 역전’은 타인과 맺은 신뢰 덕분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회장은 인터뷰 도중 갑자기 바지를 걷어 오른쪽 아킬레스건을 보여줬다. “여기 흉터가 보이나요. 이 상처가 생긴 뒤부터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20대 때 한 철강재 유통사의 잡부로 취직한 그는 자전거로 배달을 가다 사고를 당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던 중 철판이 다리에 떨어져 힘줄이 끊어진 것. 자전거 페달을 꾸역꾸역 밟아 일을 끝내긴 했지만 오랜 기간 깁스를 해야만 했다. 직장을 잃기 싫다는 생각에 사장에게 호소했다. “청소라도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매일 아침 일찍 가게로 나가 무릎으로 바닥을 끌고 다니면서 청소를 하고 잡일을 했죠.” 그런 청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던 철강재 유통사의 사장은 깁스를 푼 김 회장에게 영업사원을 제안했다. 김 회장은 그때부터 사장과 같이 다니며 장사의 기술들을 하나씩 익혀갔다. 빠른 시간 내 성과도 냈다. 거래처와 믿음을 쌓아가며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덕분이다. 김 회장은 “당시 한 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며 고객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며 “일선 영업사원이 어떻게 고객을 대하느냐에 따라 물건을 살지 말지 결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객 제일주의’를 일찍 몸으로 직접 체득한 셈이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회사 직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포인트다. 회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까다로운 고객이 명품을 만든다’는 슬로건도 그래서 나왔다.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돼도 일단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고객도 감동하고 우리 역시 최고의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뢰와 신용을 중시한 까닭에 데크플레이트 후발 주자였던 덕신하우징은 현재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사업은 죽기 살기 각오로 하는 것”
“기업을 하기로 결심했으면 죽기 살기로 해야 합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성장은 멈춥니다.” 김 회장에게 사업 성공 비결을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그의 말처럼 김 회장의 사업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근성’ 또는 ‘끈기’ 정도가 될 것 같다.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김 회장은 자신의 회사를 차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창업 자금 300만 원 모으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당시 한 달 월급이 약 8만 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목표였다. 그의 월급은 곧 가족 생활비였기에 더 힘들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밥값을 아끼기 시작했다. 80원의 식사 값도 그에게는 사치였던 것이다. “형제자매 모두 사정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죠. 내 장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밥값이라도 아껴야 했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쓰러졌고 영양실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그야말로 절박함으로 3~4년 만에 300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1980년 구로동에 ‘덕신상사’라는 작은 철강 유통 업체를 차렸다. 김 회장의 첫 사업이다. ‘대박’을 쳤다고 말할 정도로 성과도 좋았다. 김 회장은 “일을 처음 배웠던 전(前) 업체에 물건을 납품할 정도였으니 꽤 괜찮았다”며 웃었다. 회사를 키워가던 그는 철강 제조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사명도 ‘덕신철강’으로 바꿨다. “유통만으로는 사업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죠. 사업은 반드시 내가 잘 아는 분야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철강 제조 사업을 추가로 시작했습니다.” 2000년 들어 ‘덕신하우징’으로 또 한 번 사명을 바꾸고 데크플레이트 사업으로 덩치를 불려갔다. 물론 승승장구만 했던 건 아니다. 1998년 외환위기 때는 회사가 문을 닫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 그런 위기는 예고도 없이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난관을 극복한 것은 김 회장 특유의 뚝심이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소처럼 끈기를 가지고 하는 것, 그게 사업입니다.”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것···2세 경영은 없다”
김 회장은 이제 덕신하우징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시키려 한다. 덕신하우징은 업계에서는 드물게 국내 시장에 만족하지 않고 일찍부터 해외 쪽으로 눈을 돌렸다. 2015년 베트남 현지 법인을 세워 동남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에도 법인을 설립했고 올해 생산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태국·사우디아라비아 등에도 진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김 회장은 “올해 회사 슬로건은 ‘국내를 넘어 세계로’이다”라며 “앞으로 10년간 해외 지사나 사무소를 10개 더 만드는 것이 구체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김 회장에게 또 하나 남겨진 숙제가 있다. 바로 승계 작업. 다만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방침을 이미 천명했다. 인생을 바쳐 일궈낸 회사이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그런 질문을 하자 김 회장은 “왜 꼭 자식에게만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사실 그도 한때 2세 경영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꾸리는 ‘공동체 경영’이 더 적합하다고 결론 내렸다. 지금의 자신과 덕신하우징을 만든 직원들이 함께 회사를 이어나가는 게 더 경쟁력 있다는 것이 김 회장의 판단이다. 김 회장은 “2009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할 때 솔직히 조금 불안하기도 했는데 막상 해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며 “회사 경영은 유능한 사람이 하는 것이 맞다”고 힘줘 말했다.
◇He is...
△1951년 충남 홍성 △1980년 덕신상사 설립 △1990~2006년 덕신철강 대표이사 △2006~2010년 덕신하우징 대표이사 △2011년~ 덕신그룹 회장
이완기 기자 kingear@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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