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배우 최승윤 “사는 게 투쟁인 소영, 쓸쓸하지만 강인한 엄마”[인터뷰]
한국계 캐나다 감독 앤소니 심 연출
무용가·연출가·다큐 감독 최승윤 배우 데뷔
“본업은 최승윤…조급해하지 않을 것”
1990년 캐나다 한 초등학교. 학급에서 유일한 동양인인 동현(황도현)은 ‘라이스 보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엄마가 도시락으로 싸준 김밥 때문이다. 다른 애들은 모두 샌드위치류를 싸 왔다. 동현은 몰래 김밥과 국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다른 날엔 “두유 노 태권도?(너 태권도 알아?)”라고 소리치며 아이들에게 저항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시간이 지나 10대가 된 동현(이든 황)은 머리를 노랗게 탈색했다. 밖에 나갈 때는 눈에 푸른색 컬러렌즈를 끼운다. 반에는 새 한국인이 생겼지만 원주민과 잘 섞이지 못하는 그가 괴롭힘을 당해도 동현은 개입하지 않는다. 어느 날 선생님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가계도’를 그려 오라는 과제를 내준다. 집으로 돌아온 동현은 엄마에게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는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홀로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온 소영(최승윤)과 동현의 이야기를 그린다. 잔잔한 분위기지만, 가난한 이민자 가정의 고단한 일상이 강렬하게 전해진다. 어릴 적 캐나다로 이민한 앤소니 심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캐나다 배경에서는 1.33:1의 비율로 다소 답답하게 보이던 화면은 강원 양양으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1.85:1로 탁 트인다. 심 감독은 지난달 30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캐나다는 땅이 아주 크지만 영화 속 캐릭터들은 사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아름다운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작은 세상 안에 있다. 한국은 캐나다와 비교하면 작은 나라지만 캐릭터들이 한국에 돌아오면서 마음과 정신이 넓어지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의도를 설명했다. 한국으로 다시 온 소영은 뭔가를 내려놓는다. 동현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발견해 나간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드물지 않은 서사를 다루는 영화지만 담백하고 내밀한 분위기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영화 전체는 16㎜ 필름으로 촬영했다. 애정 담긴 홈비디오 같다.
심 감독은 “이 영화는 한국에서 캐나다로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한국 영화’다. 동시에 멋있고 강하면서도 복잡한 한국의 어머니들에 대한 헌사다. 영화를 본 모든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어 “저는 완전한 한국인도, 캐나다인도 아니지만 이 두 가지가 섞인 한국계 캐나다인이며 ‘계’라는 단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서 “이 영화는 북미와 해외 여러 나라에서 ‘~계 사람’으로서 비슷한 투쟁과 고통을 겪었던 한 세대의 사람들에게 제가 감사함을 전하고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엄마 소영은 강단 있는 사람이다. 태어나자마자 혼자가 됐지만 꿋꿋이 살아남아 사랑하는 이를 만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엔 아들을 자기 손으로 키우기 위해 이민길에 나선다. 직장에서 몇 안 되는 동양인이지만 주눅들지 않는다. 직장에서 자신을 추행하는 백인 남성에게 “유 돈 터치 미, 언더스탠드?(나 만지지마. 알아들었어?)”라고 소리친다. 학교에서 동현이 아이들을 때렸다는 소리를 듣고 학교에 불려가서는 ‘먼저 괴롭힌 애들이 인종차별주의자’라며 교장과 싸운다.
“소영은 사는 게 투쟁이었던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어떻게든 터득해야 했던 삶을 살았죠. 태어날 때부터 엄마·아빠도 없었고, 남편도 잃었고, 시댁에도 거부를 당하고, 나라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불행한 인생이죠. 그런데 소영은 거기 좌절하거나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약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고, 선택을 실행에 옮기면서 살아온 여자죠. 캐나다에도 그래서 왔고, 그래서 동현을 데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갑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 김민지의 ‘가을편지’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판씨네마 사무실에서 만난 최승윤은 소영을 이렇게 표현했다. 1989년생인 그는 1960년생인 소영을 연기하기 전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소영이 살던 한국의 시대상과 분위기를 파악하려 했다. 그는 “김민기의 ‘가을편지’의 멜로디가 소영의 인생이나 정서와 비슷한 느낌이었다”며 “쓸쓸하지만 강인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느껴졌다”고 했다
이번 영화로 장편영화에 데뷔한 최승윤은 무용가이자 연출가이기도 하다. 5살 때 발레를 시작했고, 예고를 거쳐 이화여대 무용과에 갔다. 무용 공연을 직접 제작한 경험도 있다. 2015년 72초tv의 웹드라마 <두 여자> 출연을 시작으로 종종 카메라 앞에 섰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를 연출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을 받기도 했다. 그는 “무용 신이 작고 관객도 많지 않다. 그래서 연출도 하고 여러 분야에 도전했다”고 했다. 본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본업은 최승윤”이라며 “할 수 있는 것, 기회가 오는 것들을 다 한다”고 답했다.
영화는 여러 캐나다 영화제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호평받고 있다. 최승윤도 지난해 11월 열린 제19회 마라케시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 그는 “영화가 예상보다 더 많은 호응을 얻어서 기분이 좋다. 마냥 좋지만은 않다. 두려움이 있다”며 “너무 (배우 인생) 초반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뭔지 모를 부담감이 있다. 그로부터 자유로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는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고 있다.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기회가 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가 필요한 작품들이 저에게 올 것 같아요. 제가 뭔가를 찾잖아요, 그것도 저를 찾고 있대요. 그걸 믿으면서 작품을 고르고, 기다리고, 오디션을 보고 있어요.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해요. 주변에서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하는데, 물이 또 오겠죠(웃음).”
영화는 19일 개봉한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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