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져가는 전세사기 피해자들…또 한발 늦은 정부
(시사저널=이혜영 기자)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 청년들의 '영정'이 나란히 놓였다. 20~30대 청년 세 명은 인천 '건축왕' 일당으로부터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뒤 벼랑 끝에 내몰렸고, 극단 선택으로 잇달아 생을 마감했다. 전세사기 피해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정부는 네 번에 걸쳐 총 22개의 대책을 내놨지만, 사각지대에 내몰려 절규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했다.
청년 3명이 스러지고 나서야 정부와 국회는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며 일부 제도 보완에 힘을 싣는 모양새다. 이대로라면 국민 모두가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절규가 터져나온다.
'사회적 재난'에 대책 없는 정부
65개 시민·사회단체는 18일 '전세 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고 정부에 피해자 구제를 위한 정책 마련을 촉구했다. 전세사기 피해는 '사회적 재난'이라며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을 매개로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전세사기는 정책적 보완이 이뤄지지 않으면 개인이 피해가기 어렵고, 피해 회복 역시 현행 제도와 법만으로는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것이 피해자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정부도 그간 전세사기 범죄 엄단 의지를 밝혔고, 제도적 장치도 보완했지만 사기범 '처벌'과 예방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실질적인 피해자 구제로 이어지는 정책 도출은 사실상 실패했다.
인천 건축왕으로부터 사기 피해를 입은 청년 3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전세사기를 당한 사실을 인지한 후 백방으로 피해 회복을 위해 뛰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명확해진 건 공장이나 직장에서 수 년간 일하며 어렵게 모은 돈 전부 또는 상당수를 허공에 날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피해자의 지갑 속 '현금 2000원'과 문 앞에 붙은 각종 독촉장만이 가늠하기 힘든 고통에 시달렸던 청년들의 고단한 현실을 대변했다.
전세사기범들은 현행 법과 제도의 허점을 노려 임차인들을 궁지로 내몰았고, 임차인들은 정부가 구축한 장치를 믿었지만 절망한 피해자들을 수렁에서 건져 올리진 못했다. 재계약시 보증금 인상률을 5%로 제한한 임대차보호법부터 최우선변제금 적용, 전세 피해 후 이사를 위한 저금리 추가 대출, 이행보증서 제도, 긴급주거지원 등이 모두 세상을 떠난 청년 피해자들에겐 허울 뿐인 정책이었다.
세입자114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태근 변호사는 18일 YTN 《뉴스라이더》에 출연해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는 살아 있는 세월호 같다"며 정책 변화가 없다면 더 큰 희생이 뒤따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피해자 구제에 적용되는 여러 '기준'과 상황 타개를 위해 또 다시 '대출을 받으라'는 일차원적 해법이 이들의 탈출구를 가로막았다고 질타했다.
정부, 한 발 늦은 '경매 중단' 카드로 뒷북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전세사기 피해가 확인된 후 구성된 피해자 단체는 줄곧 ▲전세사기 주택에 대한 경매 절차 중지 ▲기존 전세대출 관련 실질 대책 ▲우선매수권 보장 ▲피해 보증금 선 반환 후 구상권 청구 등을 요구해왔다.
피해자들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로 인한 건설사 부도 등을 막기 위해 정부가 주택을 매입해주거나, 주식·코인 등 투자자에게조차 개인 면책을 확대하면서도 전세사기 대책에는 소극적인 정부를 향해 수 차례 보완을 주문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토교통부, 금융당국은 엄단 의지를 밝히면서도 실질적 정책 마련에는 속도를 내지 않았다. 정치권도 관련 입법을 추진했지만 상당수 법안은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상태다.
그 사이 청년 3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죽음의 행렬이 있고서야 정부는 이 호소에 '일부' 응답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원희룡 국토부 장관으로부터 경매 일정 중단 또는 유예 방안을 보고받은 뒤 이를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와 함께 '찾아가는 지원 서비스 시스템 구축'도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전세사기 피해 가구 상당수가 이미 경매로 넘어간 뒤 임차인들이 퇴거 압박을 받는 등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인데다 이를 법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방안도 없는 상태여서 '실효성'을 두고 논란이 불거진다. 또 경매에 부쳐진 곳 중 감정가 절반 수준으로 낙찰된 곳도 많아 세입자가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 받지 못하는 사례도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대책위에 가입된 34개 아파트·빌라의 1787세대 가운데 경매·공매에 넘어간 세대는 총 1066세대로 59.6%에 달한다. 이 중 106세대는 이미 낙찰됐고, 261세대는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이다. 대책위는 미가입분을 고려하면 전체 피해 3079세대 중 2083세대(67.6%)가 경매에 넘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찾아가는 시스템' 역시 기존 제도 한계를 보완하는 대책이 될 수 없어 정부가 계속해서 번짓수를 잘못 짚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은 퇴로가 막힌 피해자들을 향한 또 다른 '검은 손'의 유혹은 현 상황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며 강력한 대책을 요구했다.
안 위원장은 정부 대책을 "절망스러운 수준"이라고 평가하며 이미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정책이 사실상 전무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경매를 받은 꾼들이 피해자들에게 '나라에서 저리 대출을 받아 전세계약을 하자. 살던 집에 계속 살아도 된다'고 하면서 전세금을 올린다"며 "지금은 살아남은 전세 사기 피해자가 더 걱정된다.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피해자"라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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