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단독 과반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20년 만에 국회의원 전원이 토론에 참여하는 국회 전원위원회 토론이 지난 10~13일 열렸다. 나흘 간 100명의 의원들이 연설대에 섰다. 다수 의원들이 승자 독식구도에 기반한 현행 소선구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국민 대표성과 비례성을 좀 더 강화하고 지방소멸 문제에도 대응해야 하며 지역 갈등을 완화토록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지난 11일 토론에 나선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선 서울과 6대 광역시에서라도 여러 명 의원을 뽑자고 제안했다. 한국 정치의 폐해가 '단독 과반수'의 환상 때문이란 게 김 의원의 인식이다. 단독 과반수 정치가 양극화, 인구 위기, 글로벌 대전환 등 국가적 의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라고 김 의원은 진단했다. 연합 과반수 체제로 가는 것이야말로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가는 열쇠가 될 것이란 제언이다.
다음은 지난 17일 김종민 의원이 온라인 매체 '피렌체의 식탁'에 기고한 글 전문이다.
경제는 분명히 발전했다. 여기에 정치도 기여했겠지만, 주로 시장과 시민의 역량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정치의 역할은 이런 경제의 성과를 민생으로, 국민 삶의 질 향상으로 얼마나 잘 연결시키느냐에 있다. 그게 정치성적표다.
같은 시기 민생 지표를 보자.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의 평균임금은 1999년 71.7%에서 2021년 47.2%로 내려앉았다. 하위 1분위와 상위 5분위의 소득 격차는 1990년 3.7배에서 2021년 6배로 더 커졌다. 집값도 마찬가지다. 소득 대비 주택가격이 2003년 4.19배에서 2021년 7.05배로 늘어나 집 사기가 더 어려워졌다.
비수도권 인구 비중을 보면, 1985년 60.9%에서 2021년 49.6%로 주저앉았다. 갈수록 지방에서 살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자살률은 1987년 8.2명에서 2021년 26명으로 폭증했다. 경제 발전의 그늘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출생률을 보자. 출생률은 모든 민생의 종합 성적표다. 1987년 1.53명에서 2022년 0.78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왜 대한민국 정치는 할 일을 제대로 못했나. 사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일을 열심히 한다. 문제는 그 일이 상당 부분 지역구 다지기, 정당의 정치 현안에 대한 대응 등에 치우쳐 있는 데 있다. 주로 선거에 필요한 일들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 자살률, 출생률 등 이른바 국가 의제, 국민 의제에 쏟는 에너지는 많지 않다. 이런 문제들은 이견과 이해 충돌이 첨예하기 때문에 풀기가 쉽지 않다. 대화와 타협, 합의와 승복이 필요한 문제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국 정치가 민생을 위해서 제대로 일하는 정치, 일하는 국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인가. 한국 정치에 부족한 건 과반수 권력이 아니다. 대화와 타협의 역량이다. 합의와 승복의 문화다. 국가 건설 초기에는 권력만 있으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박정희 시대가 그랬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은 대통령 권력이든, 과반수 권력이든, 권력이 있다고 다 따라오지 않는다. 시장과 시민 모두 커지고, 다양해지고, 똑똑해졌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하고 승복하지 않으면, 제대로 결정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세상이 됐다.
단독 과반수는 지지율에 비해 초과 의석이다. 지지율 40%로도 의석수는 과반수를, 운이 좋으면 180석 60%까지도 차지할 수 있다. 다수파는 착시를 일으키고 독주하게 된다. 그 초과 의석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은 승복하지 않는다. 결사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어 있다. 결국 단독 과반수 정치는 일은 제대로 못 하고, 독주와 발목잡기의 악순환에 빠진다.
연대, 연합, 협력 정치로 가야 한다. 여러 세력이 연합 연대해서 과반수를 만드는 '연합 과반수 정치'로 가야 한다. 그래야 의석수만 과반수가 아니라 지지율도 과반수를 넘길 수 있다. 연대, 연합, 협력이 필수적인 '연합 과반수 정치'에서는 '깎아내리기 경쟁'이 아니라 '협력 경쟁', '잘하기 경쟁'으로 가게 된다.
1등만 뽑는 소선거구제는 민주주의 초기에 필요했던 제도다. 한 명에게 책임을 지우니 검증과 심판이 분명하다. 작은 지역에서 유권자와 직접 소통하고 그 지역을 책임지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미디어의 발달로 정보 소통의 양과 질, 속도가 급속도로 발전했다. 여러 명 뽑아도 소통하고 평가하고 책임을 묻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도시화와 교통 통신의 발달로 국회의원이 다뤄야 할 정책 과제가 작은 지역 단위의 사업보다는 국가 차원, 국민 차원의 숙제가 훨씬 더 많아졌다. 이 시대적 상황에 맞는 대표를 뽑아야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전통적 민주주의 국가가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으니, 소선거구제도 괜찮은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그들을 따르던 유럽의 많은 나라가 이미 100년 전에 소선거구제에서 여러 명 뽑는 대선거구제로 바꿨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이 나라들은 민주주의 지수, 인간개발 지수, 행복지수 등 많은 지표에서 하나같이 선발 소선거구제 나라를 앞서가고 있다.
다음 표를 보자. 위에 있는 파란색 나라들은 하나같이 여러 명 뽑는 나라들이고, 한 명 뽑는 미국, 영국, 프랑스, 한국 등은 한결같이 아래쪽에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 제도가 더 민주적이어서가 아니라, 200년 동안 누적된 경로 의존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그 나라들과는 다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변화가 빠른 나라다. 이제 대한민국은 소선거구제 일변도의 경로 의존성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우리도 선진 유럽 나라들처럼 여러 명 뽑는 제도로 가는 게 좋다. 그것이 사회 발전단계에 맞을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고 역동적인 대한민국에 필요한 길이다.
특광역시에서 먼저 해보자고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도시야말로 대선거구가 필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서울과 광역시처럼 도시화되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소선거구를 한다는 건 솔직히 민망한 일이다. 서울의 한 구청 단위를 갑, 을, 병으로 나누면 그 경계가 어디서 구별되는지 아는 주민이 얼마나 되겠나. 그 소선거구만의 차별화된 국회의원 임무는 또 얼마나 되겠나. 트랙터와 비행기 가지고 헥타르 단위로 농사짓는 세상이 됐는데, 한두 마지기 각자 등기해 놓고 논농사를 짓는다면 일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특광역시만 대선거구로 하는 안은 개혁 가성비가 좋은 안이다. 특광역시 120석, 전국 비례 30석 등 의석의 절반에서 비례성이 높아지니 국민 대표성, 다양성 등 개혁성이 전체적으로 함께 높아진다. 정당의 유불리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민주당이 우세한 서울과 호남 선거구가 46개 정도 되고, 국민의힘이 우세한 서울과 영남 선거구가 46개 정도 된다. 절묘한 균형이 가능하다.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먼저 대구광역시의 경우를 보면, 18대 이후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대구에서 얻은 의석은 전체 12석 중 평균 10석이다. 만일 특광역시 대선거구제를 하게 되면 비례대표에서 2석 정도 추가되어 대구 의석수가 14석으로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 지난 21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얻은 정당 득표율 60%를 적용하면 8~9석 정도를 얻게 된다. 10석 얻는 선거에서 8~9석 얻는 선거로 바뀌는 것이니 큰 위협이 되는 안이 아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8대 이후 총선에서 민주당이 광주에서 얻은 의석은 전체 8석 가운데 평균 6석이다. 특광역시 대선거구제를 하게 되면 전체 의석수는 동일하고, 여기에 지난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얻은 정당 득표율 76%를 적용하면 6석 정도를 얻게 된다. 크게 손해 보는 안이 아니다.
큰 변화가 없으면 개혁의 의미가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제도가 바뀌면 새로운 정당들이 도전하게 돼 기존 정당들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보다 의미있는 변화가 있을 것이다. 설령 처음 한두 번은 기존 흐름대로 가서 큰 변화가 없더라도 선거를 두세 번 반복하다 보면 다양한 정당과 후보들이 새로 들어오고 새로운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그 변화를 보고 개혁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제도 변경의 유불리보다는 누가 더 개혁에 앞장서서 국민 신뢰를 더 받느냐에 따라 유불리가 갈릴 것이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정치개혁에 앞장선 정당에 국민은 표를 더 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재선 대통령이 된 링컨은 자신의 당 대선 경쟁자 3명, 남부군의 전쟁 지도자 3명을 새 정부의 장관에 임명했다. 통합정부, 연합정부를 구성해 남북전쟁으로 갈라진 미국의 상처를 치유했다. 독일 아데나워의 라인강의 기적, 빌리 브란트에서 콜에 이르는 동방 정책과 독일 통일, 슈뢰더에서 메르켈에 이르는 노동 개혁 등 독일 현대사의 모든 성공은 연합 과반수, 연합 정치의 힘이었다. 좌우 대결로 혼란에 빠져 있던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등 유럽 강소국들이 사회적 대타협으로 노사 대결, 좌우 대결을 극복하고 사람 사는 세상, 선진 복지국가로 발돋움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선발국을 추월할 수 있었던 것도, 단독 과반수가 아니라 연합 과반수의 힘이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 연합 과반수 정치, 여러 명을 뽑는 선거제 이 세 가지가 지금 한국 정치에 절실하다. 지난 30년 부끄러운 정치성적표, 우하향해온 민생 지표를 바꾸는 데 꼭 필요한 처방이다.
김성은 기자 gtts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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