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감청 의혹…대국의 ‘모욕’에 ‘국가의 자존심’ 어떻게 내보일까
미국의 도·감청 의혹에 “협의하겠다” 반응 보인 대통령실
서기 660년 7월11일(음력).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수도 사비성(충남 부여군) 남쪽 당나라군 진영에 도착했다. 신라군은 백제 계백 장군이 이끌던 결사대 5천 명을 뚫고 온 직후였고, 당나라군은 기벌포(충남 서천군 장항읍)에서 백제 수군을 깨뜨리고 상륙했다. 백제의 멸망이 코앞이었다.
머리털이 곧추서고, 칼집에서 칼이 튀어나오다
승리의 기운이 무르익고 축하 잔치가 펼쳐져야 하지만 이때 당나라 진영엔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당나라군 총사령관 소정방이 신라군의 독군(督軍·군대 운영을 감독하는 직책) 김문영을 목 베어 죽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약속 위반.
당초 소정방과 신라 태자 김법민(훗날 문무왕)은 각자 군대를 출발시켜 10일에 만나기로 합의했다. 당군은 이 약속을 지켰지만 신라군은 지키지 못했다. 계백의 방어가 굳건해 신라군은 네 차례 패배 끝에 가까스로 승리했다. 그리하여 신라군은 당군보다 늦게 도착했다. 당군 처지에서 약속 위반을 처벌하는 건 당연했다. 고대 세계에서 군의 움직임과 관련한 약속을 위반하는 행위는 중죄였다. 마땅한 통신수단도 없는 시절에 병력 운영을 약속대로 하지 않으면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통보받은 김유신은 크게 화냈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죄를 물으려 한다. 나는 죄가 없어 모욕을 받을 수 없다”며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치른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김유신은 큰 도끼를 쥐고 당군 진영의 문 앞으로 달려갔는데 기록은 그의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춤에 매어둔 칼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고 썼다.
사실 김유신이 평범한 장수거나 당시 신라의 처지를 더 고려했다면 이렇게 분노하기 어려웠다. 백제를 공격하러 출발했을 때 당군은 13만 명, 신라군은 5만 명이었다. 김유신의 발언을 문제 삼아 당군이 철수라도 했다면 신라군은 백제 내부에서 고립당하게 된다. 백제를 공격한다는 신라와 당나라의 전략도 따지고 보면 당나라보다는 신라에 득이었다. 당나라의 최우선 전략은 고구려 멸망이었다. 백제 공격은 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한반도 내 군량 공급과 양동작전을 맡아줄 신라의 요청으로 이뤄지는 일이었다. 내키지 않은 공격에 나선 당군이 약속 위반을 문제 삼았다는 건 정치적으로는 신라 길들이기, 즉 우열 확인하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완전한 신뢰가 있을 수 없는 ‘동맹관계’
신라군 총지휘관으로 정치적 감각이 상당했던 김유신이 이 정치적 함의를 몰랐을 리 없다. 그의 분노 속에 ‘신라는 당의 속국이 아니다’라는 정치적 메시지가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막 황산벌에서 격전을 치르고 온 신라군의 사기 유지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 너머에 있는 건 순수한 무인으로서의 분노다. ‘반드시 당군과 먼저 싸울 것’이라는 김유신의 일갈 속에는 군사령관으로서의 자존심이 묻어 있다. 결국 김유신의 분노를 들은 소정방이 김문영에게 죄를 묻지 않기로 하면서 두 나라 군대 간 긴장은 풀린다. “소정방이 죄를 용서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대국에 맞선 소국이 어떻게 자기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인간사회에서 갑이 을보다 주도권을 쥐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관계에서도 대국은 소국보다 유리한 고지에 선다. 소국은 대국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일이 빈번하다. 그렇다고 언제나 소국이 대국보다 밑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맞춰 소국이 대국에 자존심을 지키는 경우도 있다. 이 ‘국가의 자존심’을 어떻게 내보일지 가늠하는 것으로 국가 지도자의 역량이 측정된다. 660년의 김유신에게 이 역량은 ‘최대치’였다.
2023년의 대한민국 대통령실은 어떨까. 4월8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촉발된 미국 정보당국의 한국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실의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다. 미국 언론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 정보당국이 동맹국을 도·감청한 정황이 담긴 기밀 문건이 유출됐다고 보도했다. 유출 문건에는 한국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 당국자인 김성한 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지원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한 내용도 담겼다. 미국 언론은 이 문건에서 정보 출처가 ‘시긴트'(SIGINT·신호정보)에서 확보됐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도청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국가와 국가가 동맹 사이라 하여 서로를 완전히 신뢰해 배신하지 않는 건 공상과학만화에서도 쓸 수 없는 논리다. 국제관계는 냉혹하다. 미국이 타국을 도청하다 적발된 사례는 수두룩하다. 미국의 믿을 수 있는 동맹국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재임 시절 쓰던 휴대전화가 10년 넘게 도청당한 사실이, 미국 국가안보국(NSA) 직원이던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국격은 남이 정해주지 않는다
문제는 대국의 ‘엿듣기’가 아니다. ‘소국’이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미국 언론 보도 뒤 대통령실 핵심관계자는 기자의 질의에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며 “(진상 파악을 위해) 과거 전례와 다른 나라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한번 보겠다”고 말했다.
도·감청 의혹에 대한 대한민국 대통령실의 첫 반응은 “협의”다. 윤석열 정부는 다가오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성과를 거두고 싶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대통령의 외교 행보 뒤 지지율이 상승했다. 또 현재까지 이번 사건은 ‘의혹’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의혹을 재료 삼아 항의하긴 쉽지 않다. 4월11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공개된 정보가 상당수 위조됐다는 데 한·미의 평가가 일치한다”고 말해 도·감청 의혹에 선을 그었다. 그렇더라도 사건 발생 뒤 나온 첫 반응의 수위는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대통령실 대응에 “한심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다. 항의해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협의를 한다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인격도, 국격도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 국가 스스로가 결정한다. 재물과 능력이 아닌 태도가 격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도는 타인, 타국의 시선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내 시선으로 정해진다. 고대사회 최강국이던 당나라와 맞서 싸우겠다고 한 김유신이 신라의 국격을 결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2023년 대통령실이 알아야 할 사례다.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언론사 정치부에서 국회와 청와대 등을 8년간 출입한 이도형 기자가 역사 속에서 현실 정치의 교훈을 찾아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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