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가족한테도 말 못해... 잇단 죽음 멈추려면 경매부터 중지”
몇 천 만원..."10년간 뼈를 갈아 모은 돈"
경매 중지, 집 우선 매수권 등 필요
인천 미추홀구에서 '건축왕 전세사기' 피해자가 잇따라 3명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 가운데 “왜 사기를 당했느냐”며 피해자를 탓하는 사회적인 시선이 이들을 더 괴롭게 한다는 호소가 나오고 있다. 또 사기 피해자를 쫓겨나게 만드는 건물 경매를 당장 중지해달라고 피해자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왜 멍청하게 당했어" 시선... "안 당할 수가 없었다"
안상미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장은 18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나와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가족들한테 다들 얘기를 못하고 있다. ‘왜 그렇게 멍청하게 당했어’ 이렇게 되는 것이라서”라며 "(피해자들이) 피해자들한테 책임을 지우는 (정부) 대책이라든지 국민의 시선이라든지 이런 것들로 너무 힘들어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런데 얘네들(건축왕 일당)이 (인천) 미추홀구 일대 나 홀로 아파트, 빌라들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시세를 속여버리니까 안 당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미추홀구 ‘건축왕 전세사기’는 두 달간 20, 30대 청년 3명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른바 ‘건축왕’이라 불리는 남모(61)씨는 먼저 자신의 자산으로 1, 2개동만 있는 아파트나 저층 빌라를 준공한 후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세입자에게는 보증금을 받았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계속 새 건물을 지었다. 10년에 걸쳐 이런 방식으로 준공한 아파트·빌라·오피스텔은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3,000여 채에 이른다.
건물 대부분은 남씨 지인 등 바지 임대업자의 명의였고, 같은 일당인 공인중개사들이 “집주인이 재력가라 근저당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안심시켰다. 그런데도 주저하면 "전세보증금을 못 받으면 대신 갚아주겠다"며 효력도 없는 이행보증각서를 쓰며 세입자를 끌어들였다. 건축왕 남씨-바지사장-관리실장-부동산 중개인 등이 사실상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세입자를 속여 온 것이다. 그러나 남씨 자금 사정이 악화하며 그가 소유한 아파트와 빌라가 경매에 넘어가면서 전세사기 전모가 드러났다. 남씨는 지난해 1~7월 사이 인천 미추홀구 일대 공동주택 161채의 전세보증금 125억 원을 가로챈(사기) 혐의로 지난달 15일 구속 기소됐다.
힘겹게 모은 7,000만~9,000만 원 다 잃어
법원 경매에서 집이 낙찰되면 피해자들은 전세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거나 3분의 1 정도만 받는다. 종잣돈이 없는 청년들은 대출을 받아 전세금을 마련한 경우가 많아 돌려받은 3분의 1도 대출 상환에 써야 해 결국은 자신의 돈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3명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피해자 A(39)씨 : 2월 28일 사망 확인. 보증금 7,000만 원 빌라 거주. 최우선변제금(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세입자가 받을 수 있는 금액) 없음.
피해자 B(26)씨 : 4월 14일 사망. 보증금 9,000만 원 연립주택 거주. 경매 시 최우선변제금 3,400만 원만 돌려받아.
피해자 C(31)씨 : 4월 17일 사망. 보증금 9,000만 원 아파트 거주. 최우선변제금 없음.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리게 된 이들은 사망 전 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고교 졸업 후 인천 남동공단에 다니며 모은 5,000만 원을 모두 잃게 된 B씨는 사망 며칠 전 어머니에게 전화해 “2만 원만 보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안 위원장은 “이 분은 2월부터 (피해자 대책위) 단톡방을 나가셨는데 그때부터 삶을 포기하신 거 같다”며 “그 집에 처음 이사 가서 2년 동안은 생애 처음으로 자기 공간을 갖게 되면서 진짜 행복해했다고 가족분들이 그러셨다. 그런데 돌아가신 현장은 지저분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4월 18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
C씨의 집 앞 쓰레기 봉투 안에서는 “수도요금 체납입니다. 120번 확인 후 납부하세요. 미납 시 단수합니다”라는 상수도 요금 독촉장이 버려져 있었다. 김태근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변호사는 "한국 사회의 빈부 격차가 너무 크다 보니까 미추홀구 세입자들이 잘 안 다가올 수도 있다"며 "그 정도 몇 천만 원쯤이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분들에게는 지난 10년간 뼈를 갈아서 모아놓은 돈"이라고 말했다. (4월 17일 MBC 라디오 ‘신장식의 뉴스하이킥’ 인터뷰)
"시중 은행들, 경매 중지해야"
피해자들은 당장 경매를 중지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안 위원장은 “5월까지 매각이 완료되는 세대가 260여 세대”라며 “그러면 이 세대들 구제를 못하니까 무조건 일단 경매를 중지시키고 그 다음에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4월 17일 MBC 라디오 ‘신장식의 뉴스하이킥’) 일단 세입자가 주거지에서 쫓겨나는 것부터 막자는 것이다.
실제 한국자산관리공사는 경매를 연기했다. 김태근 변호사는 같은 방송에 출연해 “(제1담보권자 중) 한국자산관리공사는 경매를 연기신청한 상태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간 금융기관이 경매를 연기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금융기관은 1순위이기 때문에 1년 뒤에 경매를 하더라도 본인들의 담보원리금을 다 회수할 수 있다. 피해자들은 일상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쫓겨나는 게 너무 힘들다”며 민간 금융기관의 경매 중지를 촉구했다.
또 피해자들이 거주 중인 주택을 경매에서 낙찰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전세 사기 건물이 경매에서 여러 번 유찰돼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 이른바 ‘경매꾼’들이 물건을 쓸어가는 상황인데, 피해자에게 우선 매수권을 주고 낙찰금을 저리로 대출해달라는 것이다.
안 위원장은 “미추홀구가 대책위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대처를 하기 때문에 커 보이는 거지, 이건 전국적인 문제”라며 “제발 이제는 사회적 재난으로 인정하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SBS 라디오)
국민의힘 "정부 22개 대책 도움 못 줘 통탄스럽다"
지금까지의 대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해 피해자들의 사망이 이어지자 정부와 국회도 입장을 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앞서 체결된 전세 계약에서 피해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정부 대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또 점검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자신의 페이스북에 “전세사기는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청년들을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는 중대한 민생 범죄"라며 “어떤 대책이든 좋으니 정부는 전세 사기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정부가 네 차례에 걸쳐 22개의 전세사기 대책을 세우고 실행하고 있지만 국민들에게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통탄스럽다”며 “우선 경매 중단 조치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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