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신촌 학술단체들, 왜 장애인 권리예산 연대 나섰나
“장애는 ‘사회적 배제’…이론·운동의 만남 중요”
대학, 출판사, 도서관 등이 많은 서울 마포·신촌 지역에는 예전부터 ‘비판적’ 지적 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인문학의 위기’가 본격화된 뒤로 이곳엔 독립적인 학술단체, 연구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났다. 지난해 웹진 <공유도시>에 실린 ‘맵핑’ 작업 결과를 보면,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서교인문사회연구실, 대안연구공동체, 다중지성의 정원 등 10여곳의 ‘지식공유 공간’이 이 지역에 몰려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히 ‘학술운동’의 ‘새로운 메카’라 할 만하다.
그간 느슨한 연결 아래 교류해왔던 이 단체들이 최근 특정한 주제로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첫걸음을 떼어 눈길을 끈다. 문화사회연구소-공유공간 물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 캣츠랩, 현대정치철학연구회 등 10개 단체가 ‘장애인 권리예산 투쟁에 연대하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을 만들어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노들장애인야학 교육장에서 ‘역량으로서의 장애’란 제목의 학술 토론회를 연 것이다. 마포·신촌 학술단체들의 ‘맵핑’ 작업을 주도했으며 이번 네트워크의 준비팀장을 맡은 정정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연구자의 집 운영위원을 14일 만났다.
이 지역 학술단체들은 어쩌다 이렇게 많아졌고, 어떤 공통점을 품고 있을까? 정 연구원은 오늘날 연구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 그 과정에서 상호 인정·존중의 문화,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조건” 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짚었다.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로 ‘불안정 노동자’가 된 연구자들은 대학 안에서 교수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에 피동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만 ‘자기 실현’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한 모색이 다양한 성격의 독립적 학술단체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대학 교수의 주도 아래에선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대학 밖 세미나를 조직해서 함께 공부하고, 필요하면 다른 단체가 여는 세미나에도 참여하는 등 교류한다. 지자체 등에서 발주하는 연구 프로젝트가 있으면 서로 공유하고, 연구 지향점이 일치하는 사람들끼리 팀을 이루어 따내기도 한다.
이렇게 “선험적인 입장보다는 구체적인 필요에 의해서” 모이게 된 측면이 크지만, 이들은 “자신이 공부하는 내용으로부터 사회적인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정 연구원은 짚었다. 과거 ‘학술운동’은 마르크스주의 등 하나의 입장을 공유하며 ‘고통받는 민중을 위한 지식인의 활동’을 추구하는 측면이 컸다. 그러나 오늘날 연구자들은 연구자 권리 등 “(불안정 노동자로서) 지식인 스스로 자기해방적인 권리를 구축하거나 실현”하려는 한편 각자의 공부를 바탕으로 그것을 ‘사회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적’이란 말이 과거에 견줘 그 힘을 많이 잃긴 했지만, 민주주의, 페미니즘, 환경·생태 등의 주제들은 여전히 오늘날 연구자들을 느슨하게 연결해주는 배경이 되고 있다. 정 연구원은 “학문이 전문화되는 경향 아래 공부한 것들은 서로 다르지만, ‘비판적’ 입장 아래 그것들을 좀 더 생산적으로 교환하려는 활동이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네트워크로서 함께하는 첫걸음이 ‘장애인 권리예산 투쟁’이라는 점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공부 자체에 실천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학술운동과 오랜 관성을 깨기 위해 담론을 필요로 하는 사회운동의 만남이란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정 연구원은 “언제부턴가 비판적 연구가 사회운동 현장과 유리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컸다. 그러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장애운동(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권리예산 투쟁)이 강력한 탄압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뜻을 모으게 됐다”고 말했다. 온라인 대화방에서 진태원 성공회대 교수(현대정치철학연구회)가 “이런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공부해온 이론으로 개입하고 연대해야 할 상황”이라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참여 단체들을 모으고 장애운동 단체 노들장애학궁리소와도 협의했다. 그 결과 오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맞춰 발표할 선언문(14일 기준 208명 참여)을 함께 만들고, 그에 앞서 관련 토론회를 열게 된 것이다.
‘역량으로서의 장애’란 주제가 이런 문제의식을 응축하고 있다. 정 연구원은 “페미니즘이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부분운동’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었듯 장애운동·장애담론 역시 하나의 관점”이라고 강조했다. 신체 손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핑계로 삼은 ‘사회적 배제’가 장애인으로 하여금 모든 역량을 생존에만 투입하게 만든다. 비판적 연구는 이를 ‘장애화’(disablement) 개념으로 파악한다. 차별의 원인은 신체가 아닌 사회에 있다는 것이다. 이론과 운동은 “현실을 다시 해석하고 사회 전체와 연결시키는 관점”을 공유하며 “사회적 배제 일반에 대한 투쟁”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이들이 발표할 선언문은 이런 지향점을 명확히 밝힌다.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 사회가 사람답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돌봄의 연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네트워크는 앞으로도 느슨한 연결 아래에 지속될 전망이다. 정 연구원은 “이번 연대는 앞으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연구자들이 함께 축적해 갈 ‘공통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스로 권리를 찾고자 하는 연구자들의 당사자 운동은 2년 전 ‘연구자 권리선언’으로 분출했으며, 다양한 공유 공간과 플랫폼을 만드는 등 조금씩 성과들을 내고 있는 중이다. 이 같은 비판적 연구자들의 연대는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확장될 씨앗을 품고 있다. 정 연구원은 이론과 운동의 만남이 “폐쇄적인 제도에 갇힌 학술 연구에 사회적 의미를, 관성으로 굳어져가는 사회운동에 새로운 담론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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