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판매기록 멈춘 화랑미술제…'젊은 작가' 등용문 탈바꿈
앞다퉈 내걸던 거장급 작품들 줄고
갤러리마다 신진작가 대거 내세워
1980∼90년대생 작가 완판 이어져
하태임·이영지·고상우·권기수 등등
'젊은' 중견작가 작품도 판매 호조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그림 한 점을 두고 사활을 거는 듯,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급박한 움직임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한결 여유롭고 고즈넉해졌다고 할까. 덕분에 “이제야 ‘미술’장터답다”는 얘기가 관람객들 사이에서 나왔다. 하지만 판을 깐 주최 측 사정은 또 다르다. 은근히 기대했던 ‘역대급 판매기록’ 갱신은 멈춰 섰기 때문이다.
‘미술품을 팔고 사는 대중적인 시장’인 아트페어.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화랑미술제가 41회째로 연 ‘2023 화랑미술제’가 16일 폐막했다. 156개 화랑·갤러리가 900여명 작가들의 작품 1만여점을 내놓고 ‘최대·최다 규모’를 내걸었던 올해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닷새간 열린 화랑미술제를 찾은 관람객 수는 5만 8000여명이다. 아트페어를 주최한 한국화랑협회는 “첫날 4500여명을 포함, 닷새간 5만 8000여명이 방문해 전년 대비 5000여명이 늘었다”며 “관람객 수로는 역대 최대”라고 전했다. 하지만 매해 판매액 홍보에 열을 올렸던 것과는 달리, 그 관람객들이 사들인 미술품 판매액에 대해선 입을 닫았다. 협회는 “화랑미술제에서 총매출 발표는 없을 예정이나 특수한 상황이 있을 경우 고려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결국 그 ‘특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제껏 화랑미술제가 쓴 최고 판매액은 지난해 ‘2022 화랑미술제’에서 관람객 5만 3000여명이 사들인 177억원어치. 이태 전 ‘2021 화랑미술제’가 관람객 4만 8000여명을 들여 72억원 판매액을 써냈던 ‘이제껏 없던’ 성적을 내며, 두 해 연거푸 ‘역대급 실적’이란 말을 끌어냈더랬다.
물론 모든 상황을 매출액 한 가지가 다 말해주진 않는다. 덕분에 올해의 현장 역시 예년의 역대급들보다 ‘못한’이 아닌 ‘다른’으로 결산할 수 있다. 떠들썩한 퍼포먼스도 없고 북적거림도 없었던, 좋게 말하면 ‘차분하다’고, 덜 좋게 말하면 ‘한산하다’고 할 만한. 여기에는 지난해 서초구 양재동 세텍보다 1.5배쯤 넓어진 ‘공간의 변화’가 한몫했다. 한 관람객은 “지난해 세텍에선 흔했던 어깨 부딪히는 일이 올해에는 거의 없었다”며 “쾌적하게 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론 갤러리들이 미는 주력 작가·작품의 분위기가 바뀐 게 가장 커 보인다. 매번 매출을 끌어올리는 데 공을 세운 대가의 대작이나 오픈런을 부르는 인기작가의 인기작품 등 ‘따놓은 자리’를 이번엔 달리 운영했다는 게 맞을 거다.
젊은 작가로 젊은 컬렉터 겨냥한 갤러리들
“우린 이번 페어를 젊은 작가들로 꾸몄습니다.” 올해 화랑미술제 현장에서 각 부스를 차지한 갤러리스트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실제로 아트페어만 열리면 늘 갤러리마다 앞다퉈 내걸던 이우환·박서보·하종현·이건용·이강소·심문섭 등 거장급 작품은 상대적으로 눈에 많이 띄지 않았다. 대신 갤러리마다 자신들의 신진작가들을 대거 내세운 게 특별한 점이란 얘기다.
학고재갤러리는 박광수·이우성·김은정 등 1980년대 작가들의 작품 위주로 부스를 꾸몄고, 아트사이드갤러리는 1990년대생 송승은을 비롯해 조은·최수인 등 1980년대생 작가들의 그림을 대거 내놨고, 아라리오갤러리는 1986년생 노상호 작가의 드로잉을 ‘옷걸이 걸린 그림’처럼 걸고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작가들의 연령대만 낮춘 게 아니다. 이들 작가의 작품들은 대부분 ‘완판’ 또는 그에 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요즘 한국화단에서 ‘허리’를 담당하는 ‘젊은 중견’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가나아트는 하태임·김선우 작가의 원화와 판화를 동시에 걸고 50점씩 준비한 판화에디션을 솔드아웃시켰다. 선화랑은 이영지 작가의 출품작 5점을 다 팔았으며, 화랑미술제에 처음 선뵌 더컬럼스갤러리의 이현정 작가는 한지 기반의 독특한 작품 모두를 팔아치웠다. 또 아뜰리에아키는 권기수 작가의 ‘동글이’ 그림을, 갤러리나우는 고상우 작가의 ‘멸종위기동물’ 연작에 ‘빨간딱지’(판매됐음을 알리는 스티커)를 연달아 붙여냈다.
젊은 컬렉터를 겨냥해 단독 작가로 부스를 마련한 ‘젊은 솔로쇼’도 관객몰이에 나섰다. 노화랑의 이사라 작가는 회화와 조각, 우드커팅 등 30여점의 절반 이상을 판매하는 등 호조를 보였고, 동산방화랑의 박희섭, 나인갤러리의 우병출, 예원화랑의 문화, 예화랑의 박현주, 우손갤러리의 이영미, 어반아트의 차규선, 갤러리미루나무의 최성환 등도 주요한 성과를 낸 작가 리스트에 들었다.
그렇다고 대형작가들이 숨죽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국제갤러리는 독일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의 대형사진을 8500만원대에, 바이런킴의 신작회화를 9500만원대에 판매했다. 리안갤러리는 이건용의 신작회화를, 샘터화랑과 조현화랑은 각각 박서보와 이배의 회화작품을 솔드아웃시켰다.
신진작가 비중 점차 높아져…대작 위주의 키아프와 구별
화랑미술제가 신진작가 발굴프로그램으로 띄우고 있는 ‘줌인(Zoom-In) 특별전’은 ‘아트페어 속 전시’로 관람객들의 발길을 잡았다. 올해 네 번째로 진행한 특별전은 470여명의 공모를 받아 그중 선별한 10명의 작가(강민기·강원제·김보민·김재욱·백윤아·손모아·심봉민·이해반·젠박·조윤국)가 각자의 장기를 유감없이 드러낸 ‘볼거리’ 이상이었는데. 관람객들의 현장투표를 받고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친 3명에겐 상도 줬다. 작가 젠박이 줌인 부문 대상과 후원사 포르쉐의 특별상(드림 인 풀 컬러 상)을 수상했고, 강민기와 손모아가 줌인 부문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각각 받았다.
올해 화랑미술제가 변모한 모습을 두고 ‘아트페어의 색깔 변화’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처음으로 작품을 사간 컬렉터가 많았다”는, 한국화랑협회가 취합한 갤러리들의 응답만으로 올해 전개될 미술시장의 판세를 점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협회가 주최하는 또 하나의 아트페어인 키아프(KIAF·한국국제아트페어)와 차별성은 선명해지게 됐다. 화랑미술제에서만큼은 젊은 신진작가의 비중이 점점 높아질 게 분명해 보여서다.
일단 관심은 5월에 바투 날을 잡은(4∼7일) ‘아트부산 2023’으로 쏠린다. 화랑미술제와 다른 점이라면 ‘글로벌급’이란 것.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 전관을 빌리고, 세계 22개국에서 온 146개 갤러리가 참가한다는 예고로 예외 없이 ‘역대 최대규모’를 내걸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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