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 하나부터 뒷모습까지 연기하는 김서형의 압도적인 내공('종이달')

정덕현 칼럼니스트 2023. 4. 18. 11:3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형 놀이 같은 거짓 삶, 김서형이어서 설득력 있는 ‘종이달’의 의미
‘종이달’, 돈에 대한 이토록 치열한 시선을 담은 드라마라니

[엔터미디어=정덕현] 마치 환하게 떠 있는 보름달 같은 빛을 유이화(김서형)는 바라본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빛이 꺼져버린다. 그건 보름달이 아니라 가로등 불빛이다. 가로등에서 카메라가 살짝 옆으로 비껴가면, 가려져 있던 진짜 초생달이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인다. 유이화는 탄식하듯 낮게 혼잣말을 한다. "보름달이 아니었어."

지니TV 월화드라마 <종이달>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종이달'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유이화의 시선으로 이 작품이 말하려 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종이달'. 도대체 이건 무얼 상징하는 걸까. 일본원작 소설에서 '종이달'이라는 제목은 옛날 일본 사진관에서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고 그 밑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던 호시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장 행복했던 한때처럼 다가오지만 그건 '가짜 행복'이기도 하다는 것.

하지만 그 '종이달'이라는 이미지는 역시 '돈'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무언가 손으로 쥐고 싶고 또 소유하고 싶지만 그 실체를 손에 닿지 않고, 대신 가짜를 진짜처럼 의미부여 해 그렇게라도 갖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어떤 것. 가짜 달이지만 손에 쥐고 싶어 만들어낸 종이로 만든 달 같은. 그건 다름 아닌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한 자본화된 삶 속에 내던져진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 돈이다.

<종이달>에서 유이화가 마주한 삶이 그렇다. 그는 야망 있고 잘 나가는 남편의 그늘 아래서 화려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자신이 집 천장에 매달아 놓은 모빌처럼 누군가의 대상이 되어 수동적으로 흔들리는 '인형'의 삶이다. 남편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화에게 회사의 사교모임에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으라고 하는 인물이다. 그렇게 비싼 옷을 차려 입고 상사의 눈에 들자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며 손익계산을 하면서 즐거워하는 남편이다. 이화는 모빌을 뜯어낸다.

양손잡이지만 왼손을 쓰는 걸 마치 경박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못하게 막는 남편 때문에 이화는 오른손만 쓴다. 그 이야기에 민재(이시우)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쪽이 더 좋은데요? 좋은 대로 사세요. 번복될 수 없는 게 인생인데." 이화는 인형 놀이 같은 삶에 포획되어 있다. 그의 남편 최기현(공정환)이 만들어낸 그 인형 놀이는 한 마디로 자본화된 세상에서의 '돈 놀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어떻게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벌겠다는 자본 기계 같은 이들이 강요하는 인형의 삶.

하지만 저축은행에 들어가 VIP 담당 업무를 맡으면서 이화는 그 돈의 실체를 보게 된다. 자신이 얼마를 가졌는지도 모른 채 돈이면 다 되는 것처럼 성희롱을 하고, 손자에게마저 사채업자처럼 구는 추악한 노인을 만나고, 젊어서 방석집으로 젊은 여자들을 팔아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홀로 남아 치매를 가진 채 외로움에 괜스레 은행 담당자를 오게 해 수다를 떠는 할머니를 만난다. 그들은 부유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자본 기계처럼 살았지만 그래서 결국 얻은 건 뭘까. 마치 '종이달' 같은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한 가짜 행복이 아닐까.

<종이달>은 인형 놀이 같은 삶으로 극단에 몰린 이화가 은행 돈에 손을 대게 되고 그로 인해 거액을 횡령해 해외로 도주하는 범죄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도발적인 사건은 마치 이 자본 기계들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저항이자 절규처럼 그려진다. 가진 자들은 그렇게 갖기 위해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가진 게 없는 이들은 돈이 없어 작은 꿈 하나 펼치지 못한 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다.

가진 자에 포획되어 있지만 가진 것 없어도 꿈이 있고 인간의 온기가 있는 이들에게 마음이 가는 이화는 그 중간의 위치에 서서 갈등한다. 돈을 위한 돈이 아니라, 진짜 삶을 위한 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위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짜의 위선적 삶으로서의 '종이달'을 욕망하는 삶이 아니라, 진짜 달을 바라보고 마주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원작을 가진 <종이달>은 2014년 일본에서도 영화로 리메이크된 작품이다. 그런데 최근 내한한 원작 소설가 카쿠타 미츠요는 같은 작품이지만 일본과 한국의 리메이크에 있어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너무나 달라 흥미로웠다고 했다. 즉 일본판 여주인공 리카는 "어느 순간 자기통제를 잃고 괴물이 되어간다"면 한국의 이화는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고 느껴졌다"는 것.

이 차이는 이화가 보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한다는 의미일 게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왜 이화가 이런 범죄로까지 나아가게 되는가에 대한 설득력일 게다. 그런 점에서 섬세한 심리변화를 손끝 하나에서부터 뒷모습에 이르기까지 표현해내는 김서형의 내면 연기는 이 작품을 압권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은 자본 깊숙이 들어온 우리네 삶의 실체를 섬뜩하지만 냉정하게 바라보게 됐다. 또한 그가 이 괴물 같은 세상의 뱃속에서 어떤 모험(?)을 펼쳐나갈지도 궁금해졌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지니TV]

Copyright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