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이끌어 가는 여성들의 서사 ‘퀸메이커’[플랫]

플랫팀 기자 2023. 4. 1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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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와 재벌을 그린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정치인·재벌 회장은 모두 남성이었다. 정치와 재벌 서사는 그대로 두고 모든 주요 배역을 여성으로 바꾼다면? 지난 14일 공개된 넷플릭스 11부작 드라마 <퀸메이커>가 그렇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 넷플릭스 제공

<퀸메이커>는 시작부터 이채롭다. 재벌그룹의 해결사 역할을 하던 똑 부러지는 전략기획실장 황도희(김희애)가 그룹을 벗어난다. 황도희는 ‘흩어지면 죽는다’는 민중가요를 목청껏 부르며 고공농성을 하던 여성 노동인권 변호사 오경숙(문소리)을 서울시장에 출마시킨다. 그의 선거 캠프도 대부분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악인은 재벌그룹 사위인 백재민(류수영)인데 그를 뒤에서 후원하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법한 재벌 ‘회장님’도 여성 손영심(서이숙)이다. 재벌 회장 후계 구도도 두 딸이 경쟁한다. 오경숙이 서울시장 선거 출사표를 내고 처음 맞붙는 경선 상대는 노련한 3선의 여성 국회의원 서민정(진경)이다. 극 중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고 노동자는 김선영이 맡았다. 드라마에서 주요 보도를 하는 기자도 여성이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열쇠를 모두 여성이 쥐고 있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아니다. <퀸메이커>는 ‘정치’를 주요 소재로 활용한 드라마에 가깝다. 드라마는 시작부터 현실 정치에서 벌어진 일을 가지고 온다. 남성 정치인의 비서 성폭력과 ‘미투’가 바로 이 드라마의 시작 지점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의 한 장면. 재벌그룹 해결사 역할을 하던 황도희(김희애)는 인권 변호사 오경숙의 서울시장 출마를 돕는다. | 넷플릭스 제공

무소속인 오경숙과 국민개혁당 서민정 3선 의원의 단일화 경선 이야기는 2011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이뤄진 ‘박영선·박원순’ 단일화 경선을 모티브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주당 측에선 이 경선 제안을 수용하고, 경선에서 지면 민주당의 존립근거가 사라진다는 등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드라마에서 오경숙이 제안한 경선을 받아들일지 말지 논의하는 대목에서는 당시 민주당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그대로 재연된다.

이 드라마의 빌런 백재민이 커터칼 테러로 동정표를 얻는 모습은 2006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유세 도중 피습당해 얼굴에 상처를 입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박 대표가 병원에서 회복 중 선거 상황을 물었던 “대전은요”라는 말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드라마에서 오경숙이 노동자들의 휴식 공간 크기를 표현하기 위해 신문지를 가지고 나와 드러눕는 장면은 고 노회찬 의원이 2017년 국정감사장에서 신문지를 깔고 드러누웠던 일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 의원은 당시 구치소에 있던 박근혜씨가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하자 일반 제소자들은 더 좁은 공간에서 지내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신문지를 깔고 누웠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의 한 장면. 인권 변호사 오경숙(문소리)은 서울시장 출마에 나선다. | 넷플릭스 제공

서민 정치를 외치는 3선 의원 서민정이 고액의 피부과를 이용하고 고가의 필라테스 강습을 받았다는 의혹이 경선 직전에 터져 타격을 받는가 하면, 오경숙이 시민 후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으로 지지율이 떨어지는 일도 그려진다.

무엇보다 가장 현실 정치와 닮은 점은 드라마에서도 정책 대결은 없다는 대목이다. 투표일 2주 전을 그린 드라마 후반부는 본격적으로 뒤집고 뒤집히는 양측의 네거티브전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이 재미를 더하기도 하지만 이렇다 할 정책 대결이 없던 지난 대선과 닮아 있어 씁쓸함을 남기기도 한다.

<퀸메이커>의 또 다른 서사 줄기는 ‘재벌’이다. 아시아 최고의 면세점을 짓기 위해 재벌이 정·관계를 대상으로 벌이는 로비, 언론과 권력을 쥐고 흔들려는 행태, 재벌집 자녀가 ‘갑질’로 조사받기 위해 포토라인에 섰을 때 그의 패션 아이템으로 여론의 시선을 돌리는 행태, 혼외자 이슈까지 모두 흔한 재벌 스토리다. 특히 초반 전략기획실장으로 일하는 황도희의 모습에서는 해결사 역할을 하던 <재벌집 막내아들>의 윤현우(송중기)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의 한 장면.

연출을 맡은 오진석 감독은 지난 11일 제작보고회에서 ‘퀸메이커’라는 제목을 두고 “영어에 킹메이커라는 말은 있지만 퀸메이커라는 말은 없는데 그만큼 정치나 권력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것이었다는 뜻”이라며 “그 세계에 두 여성이 정면으로 나서 충돌하고 연대하는 과정을 담으려 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왜 이렇게 약자를 위해 싸우느냐’는 대사를 거론하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강렬한 이야기, 센 캐릭터로 소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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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이익을 나누는 이익공유제 등 극 중 해법은 새롭지만 감독 말대로 <퀸메이커>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사실 소박하다. 전개도 다분히 통속극의 전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퀸메이커>는 아찔한 하이힐 위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진두지휘하는 김희애의 노련한 연기와 선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초심 가득한 정치인을 연기해내는 문소리의 조합이 어우러져 그 자체만으로도 볼만하다. 김희애와 문소리는 이 작품에서 처음 만났다. 문소리는 제작보고회에서 김희애와의 연기를 두고 “조심스럽고 어려운 마음도 있었다”면서 “(대하기 어려워) 눈 질끈 감고 식사 요청도 했는데 어느 순간 서서히 호흡이 맞는 순간이 있었다”고 말했다.

TV 요리프로그램에서 밥을 잘 짓는 법을 가르쳐주는 남편 이미지인 류수영의 악인 연기도 새롭다. “네가 보살이야? 넌 뭐가 이렇게 느긋해, 이 촘촘한 ××야”라며 찰떡같은 욕을 구사하는 3선 의원 역을 연기한 진경의 모습도 재미를 더한다. <퀸메이커>는 16일 넷플릭스 ‘오늘의 톱 시리즈’ 1위를 기록하고 있다.

▼ 임지선 기자 vision@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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