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토리어스하지 않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
제프리 로즌 지음, 용석남 옮김, 이온서가, 1만8000원
"9명의 연방 대법관 중 몇 명이 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BG)의 답변은 유명하다. "9명 전부 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죠? 1981년까지 대법관은 모두 남성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2020년 세상을 떠난 RBG. 그는 30년 가까이 대법관을 지내며 남녀평등에 기여한 여러 판결을 내렸다. 대중의 기억 속 그는 위와 같은 '사이다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는 아흔 살의 대법관에게 열광하며 전설적인 래퍼 '노토리어스(notorious·악명 높은) B.I.G.’에게서 딴 '노토리어스 RBG’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는 RBG가 20년간 우정을 이어온 법학자 제프리 로즌과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말 한마디마다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를 따라가다 보면 사이다 발언 너머 RBG라는 인간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책은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RBG를 대법관에 임명할 할 당시 여성계가 반기를 들어 RBG가 곤경에 빠진 일을 비중 있게 다룬다. 당시 RBG는 이미 명망 높은 여성 인권 변호사였다. 그런데도 여성계가 반대하고 나선 이유는, 1973년 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RBG가 비판해서였다.
RBG의 비판 요지는, 여러 지역에서 이미 임신 중지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며 아래로부터의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시점에 대법원이 지나치게 파격적인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민주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안에 법원이 선제적으로 개입해 잔존한 갈등을 강제로 매듭지을 경우 불화의 불씨를 남겨놓는다고 우려했다. RBG는 당시를 회상하며 임신중지권은 보장되어야 하지만 판결에 대해서는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논쟁하고 결론지었어야 할 일입니다. 9명의 늙은 대법관이 아니고요"라고 평했다. 앞날을 내다본 것일까, 2022년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한다.
RBG는 흔히 대중에게 인식된 '투사’의 이미지와 달리 법조인들 사이에서는 법원의 사회적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사법 미니멀리즘’의 사도로 불렸다. 사회의 점진적인 변화를 믿었으며, "법원은 여론보다 너무 앞서지 말되, 앞선 판례를 무력화시키기보단 존중해야 한다"는 본인의 철학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또한 판결의 명확성과 안정성을 위해 대법원은 되도록이면 만장일치로 의견을 내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 그래서 관점이 다른 대법관들과도 끊임없이 토론하며 합의를 도출하려 노력했으며 본인도 초당파적인 결정을 내릴 때가 많았다. 이는 대법원 내 자신과 헌법을 바라보는 견해가 가장 달랐던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과 오페라를 보러 갈 정도로 친밀하게 지낸 그의 태도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RBG의 면모를 존경하는 판사가 많아 그는 '판사들의 판사’로 불리기도 했다.
설득과 합의를 중시한 RBG가 미국 정치사에서 당파주의가 심해진 2010년대 들어 '진보의 아이콘’으로 큰 인기를 얻은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는 실제로 말년에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과 자주 의견 차를 보였고, 타협하기보단 소수의견서를 작성해 본인의 의사를 피력했다. 그가 진보의 아이콘으로 거듭나며 큰 인기를 얻게 된 배경이다.
RBG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자신은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주변 환경이 변화했다"며 대화와 타협이 설 자리를 잃은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책 말미에 정파에 따라 분열된 대법원, 깊어진 갈등의 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정치권에 대해 심한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도 미래를 묻는 질문에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믿는다"며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책을 덮으며 RBG가 이룩한 사회 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투사’적 면모보다는 매 순간 치밀하게 고민한 민주주의자로서의 행보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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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온서가
오홍석 기자 lumie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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