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가거나 감옥 가거나…트럼프의 ‘사법 서커스’ 시작됐다
“절대로 그만두지 않는다. 난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다.”
미국 역사상 기소된 첫번째 전직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법정에 불려나온 지 일주일 만인 지난 11일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죄 판결이 나와도 백악관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의지는 꺾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는 법원 출석 날인 지난 4일 맨해튼 형사법원 직원들이 울며 “미안하다”고 했다고도 주장했다. 법원에선 “그런 일은 100% 없었다”고 반박했지만, 늘 그렇듯 트럼프는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일 따위는 상관없어 보인다.
유력 대선 주자의 기소라는 전례 없는 ‘사태’가 트럼프 개인의 운명은 물론 미국 정치에 어떤 결과를 몰고 올까. 재판과 대선 경선, 본선이 맞물리는 미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며 내년 미국 정치의 불가측성이 한결 커지게 생겼다. 이번 기소가 트럼프의 도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시나리오별로 살펴본다.
시나리오 1: 유리하다
이번 기소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적 탄압’이라는 트럼프의 주장은 지지층을 중심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트럼프 선거캠프는 15일 올해 1분기에 후원금 1880만달러(약 245억원)를 모았는데, 지난달 30일 기소 뒤 2주 만에 1540만달러가 들어왔다고 밝혔다. 2주 만에 모은 돈이 석달간 모은 액수에 맞먹는 것이다. 트럼프 쪽은 지난해 8월 백악관 자료 무단 유출에 대해 연방수사국(FBI)이 마러라고 리조트를 압수수색한 직후에도 후원금이 급증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의 주장이 먹히는 것은 일부 여론조사로도 확인된다. 이달 7일 발표된 <로이터>-입소스 조사에서 공화당원들의 58%가 그를 대선 후보로 지지했고, 유력 경쟁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21%를 얻는 데 그쳤다. 이 조사에서 공화당원들의 약 40%는 기소 때문에 그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 졸전 책임론에 한때 지지율이 디샌티스에게 역전당하기도 한 트럼프로서는 기소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런 현상은 맨해튼 검찰의 움직임을 공화당 외부에서 가해지는 위협으로 받아들여 지지층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효과가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공화당의 다른 대선 후보군조차 그를 편들 수밖에 없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니키 헤일리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트럼프의 기소는 “정의보다는 복수”라고 비판했다.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도 “분노한다”고 했다. 최대 경쟁자인 디샌티스마저 기소 당일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법의 무기화는 법치를 뒤집는 것이다. 그것은 비미국적이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띄웠다.
트럼프에게 유리한 또 다른 요소는 애초 그에 대한 도덕적 기대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또 2016년 대선 직전 포르노 배우 등에게 성관계 입막음용 돈을 준 것은 2018년부터 불거진 문제라 이미 지지 여부에 상당히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트럼프는 부끄러운 일로 기소됐다는 ‘상식적인 악재’를 재판 과정에서도 호재로 만들려 할 것이 확실시된다. 재판을 대선 때까지 끌고 ‘사법 서커스’를 벌이며 계속 정치 무대의 중심인물이 되는 것이다. 백악관에 들어가지 못하면 투옥될 가능성까지 있는 그로서는 더욱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 2: 불리하다
하지만 선거에서는 중간층과 무당파 등 부동층의 동향이 매우 중요하다. 당내 경선만이 아니라 본선 경쟁력까지 고려하면 더 그렇다. <시엔엔>(CNN)이 이달 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무당파의 60%가 트럼프의 기소를 지지한다고 반응했다. 당내 경선에서는 트럼프의 입지가 유리해졌지만 본선 경쟁력에는 마이너스 효과가 발생한다고 볼 수도 있다.
트럼프에 대한 도덕적 기대가 아무리 낮다지만 자꾸 추한 측면이 부각되는 게 이로울 리 있냐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선거 전문 사이트 파이브서티에이트가 1998~2016년 부패나 성추문 등 스캔들에 휩싸인 하원의원들의 선거 결과를 분석한 결과도 참고할 수 있다. 이 분석에서 17명 중 14명이 애초 예상보다 득표율이 줄었다. 평균으로는 상대에게 30.5%포인트 앞설 것으로 예측됐으나 스캔들 이후 실제 득표율은 21.5%포인트 앞섰다. 스캔들이 득표율을 평균 9%포인트 깎아먹은 셈이다. 성관계 상대 여성들의 입을 막으려고 한 것도 트럼프라고 해서 도덕적·사법적 논란에 완전히 면역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수사에 결정적 기여를 한 자신의 ‘집사 변호사’ 출신인 마이클 코언을 상대로 5억달러(약 6560억원)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낸 것도 재판에서 그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따라서 본선 경쟁력을 신경 쓰는 공화당 전략가들 사이에서 지금 상황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재판에 시간을 빼앗긴다면 선거운동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밑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으나 지금은 반트럼프 인사가 된 존 볼턴은 “트럼프는 패자”라며 “그는 2018년 중간선거에서 졌고, 2020년 대선에서 졌고, 2022년 중간선거에서 졌고, 2024년 대선에서도 질 것”이라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2020년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트럼프와 갈등을 빚은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는 15일 공화당 전국위원회 행사에서 “2020년 대선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하는 우리 후보가 있다면 대선에서 부동층한테 한표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시나리오 3: 전망 불가다
맨해튼 검찰은 트럼프에게 장부나 수표 위조 34건 하나하나에 죄를 묻겠다며 그 숫자대로 중범죄 혐의를 적용했지만, 혐의 사실은 간단하다. 선거에서 불리해질까 봐 입막음 돈을 주고 그것을 숨기려고 장부 등에 허위 내용을 적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의 우환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혐의로 인한 기소가 뒤이을 수 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법무부가 2021년 1·6 의사당 난동 사태에 대한 그의 책임을 규명하는 수사를 벌이고 있고, 퇴임 때 백악관 자료를 무단 반출한 것을 두고도 기소 가능성이 거론된다.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검찰이 대선 결과 조작 시도에 대해 벌이는 수사도 큰 파장을 낳을 수 있다. 트럼프가 의사당 난동 사태 직전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전화해 자신이 이긴 것으로 만들라고 압박한 것을 두고 20명가량이 처벌될 가능성까지 떠오른다. 트럼프는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표 차이를 염두에 두고 “1만1780표를 찾아내라”고 요구했다.
반대로 사법 리스크가 트럼프 지지세를 계속 결집하는 역설적 상황이 지속될 수도 있다. 퀴니피액대가 기소 직전에 한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원들의 79%가 트럼프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을 지지한다고 했다. ‘공화당=트럼프 당’이라는 공식을 뒷받침하는 결과다. 하지만 부정적 뉴스가 이어지면 중도층 민심이 그와 멀어질 수 있다. 여러 재판에 출석하느라 선거운동에 집중할 시간을 빼앗긴다면 본선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 한때 지지도에서 그를 앞선 디샌티스가 전세를 뒤집지 못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런 요소들까지 고려하면 ‘불사조’ 트럼프가 마침내 쓰러질지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대선 본선까지 1년 반 이상 남은 상황이라 섣부른 예측이 쉽지 않다. 또 공화당 경선에 어떤 인물들이 몇이나 나서느냐, 미국 경제 상황이 어떠하냐 등 다른 요소들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지금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 트럼프를 둘러싼 혼란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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