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순위, 모두 원클럽맨으로 남았다

김종수 2023. 4. 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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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돌아보기⑪] 2008년 드래프트

 

지난 회에서 언급했던 2007년 드래프트는 ‘역대 최고’로 평가받을 만큼 황금드래프트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한 기세는 2008년에서도 이어졌다. 전체적인 선수층에서는 2007년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1~4순위까지의 무게감은 대등 혹은 그 이상이었다는 평가다. 여기에는 국내 최초 NBA리거 ‘빅터팬’ 하승진(37‧221.6cm)의 영향이 컸다.


하승진의 선수로서의 기술적 완성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골리앗’ 서장훈이 올려다봐야 할만큼 엄청난 하드웨어를 가진 선수가 코트에 서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조건 1순위는 보장이었다. 그간의 1순위를 모두 모아놓아도 거기서 다시 1순위를 경합할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2순위 '아르헨티나 특급' 김민수(41‧200cm), 3순위 '리틀 김주성' 윤호영(38‧195.6cm), 4순위 '강페니' 강병현(38‧194cm)까지…, 어지간한 드래프트였다면 모두 1순위가 가능한 선수들이었다. 이같은 가치를 확인시켜주듯 1, 2순위에 지명됐던 하승진, 김민수는 자신을 지명한 KCC와 SK에서 커리어를 마쳤다.


윤호영같은 경우 아직 현역이지만 선수생활 내내 DB에서 활약하며 사랑받았던 선수이니만큼 큰 변수가 없다면 원주에서 은퇴할 공산이 크다. 결과적으로 1~3순위 모두 원클럽맨으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길지않은 시간 KCC에서 뛰었음에도 여전히 ‘전주의 심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강병현이 아쉬울뿐이다. 농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강병현이 트레이드되지 않았다면 KCC의 현재 역사는 상당 부분 바뀌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3년부터 신인드래프트 상위지명을 주도한 것은 단연 연세대였다. 2003년(김동우), 2005년(방성윤), 2006년(전정규), 2007년(김태술), 2008년(하승진)에 걸쳐 1순위를 배출했다. 2003년~2008년 사이 유일하게 1순위를 내지 못한 때가 2004년 드래프트인데 이정석이 양동근과 경합 끝에 아쉽게(?) 2순위로 지명된 바 있다.


만약 이때마저 이정석이 먼저 지명되었다면 6년 연속으로 특정 대학에서 1순위가 나오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연세대는 직전 드래프트에서 1, 2, 3순위를 휩쓴 것을 비롯 1라운드에서만 4명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던 것과 달리 2008년에는 1라운드 1명, 2라운드 1명, 3라운드 1명에 그쳤다. 하지만 1라운드에서 지명된 1명이 1순위라는 점에서 숫자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는 후문이다.


중앙대같은 경우 1라운드 3, 4순위를 비롯 2라운드 1명, 3라운드 1명으로 체면 치례는 했다. 인상적인 것은 동국대였다. 대학리그에서 약체급에 속했던 동국대는 대대로 드래프트에서 별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못했다. 그나마 2001년 3순위로 김승현을 배출한 것이 최대 수확이었다.


2008년에서는 1라운드(3명), 2라운드(1명)에 걸쳐 무려 4명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단순히 숫자만 채운 것도 아니었다. 6순위 정재홍, 9순위 기승호, 10순위 천대현은 스타급 선수까지는 되지못했지만 평균 이상의 커리어로 선수 생활을 가져가며 이름을 남긴 선수들이다. 로터리픽을 제외하면 가장 빛났던 학교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대의 후퇴는 계속됐다. 고려대는 2001년 전형수(2순위)를 마지막으로 로터리픽 지명 선수가 나오지않고 있었다. 라이벌 연세대, 중앙대가 잘나가는 것은 그렇다쳐도 한양대, 성균관대, 경희대, 건국대 등 한수 아래로 평가받는 다른 학교들에서도 로터리픽 신인이 배출됐지만 고려대는 침묵하기만 했다. 그나마 차재영(38‧193cm)이 강병현 다음인 5순위로 지명된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희소성 갑’ 하승진, 또다시 이런 선수가 나올 수 있을까?

최근 농구계는 선수들의 사이즈가 커지고 기술적 완성도가 늘어가는 가운데 예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유니크한 선수들이 늘어가고 있다. 특히 2m가 넘어가면서도 빅맨 외 포지션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해외파 이현중과 여준석이 대표적이다. 이현중(202cm)은 국내 기준으로 역대 최장신 슈터이며 여준석(203cm)은 잘생긴 외모에 더해 엄청난 운동신경까지 뽐내며 주변을 놀라게하고 있다.


KBL도 만만치않다. 신장대비 엄청난 스피드로 유명한 송교창(201.3cm)은 단순히 빠른 것을 넘어 어지간한 가드도 외곽에서 쫓아다니며 수비를 할 수 있다. 이부분 국내 버전 끝판왕은 최준용(200.2cm)이다. 그는 장신 스윙맨으로서 고른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실제로 포인트가드가 가능할 정도의 시야와 패싱능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로 따진다면 ‘제2의 000’이 나오기 가장 힘든 선수는 하승진(38‧221.6cm)일 가능성도 높다. 기술로만 따진다면 평범할 수도 있다. 특별히 대단한 비장의 무기도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승진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엄청난 신체였다. ‘키로 농구했다’고 혹평을 퍼붓는 이들도 적지않지만 무엇보다 사이즈가 중요한 농구에서 그만한 재능은 없다.


단순히 어지간한 센터급으로 큰 것도 아닌 역대 최장신이다. 2m 전후의 신장에 기술까지 갖춘 선수도 놀랍지만 하승진 정도의 압도적 신체조건을 가진 선수는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지 가늠이 안될 정도다. 단순히 키만 큰 것이 아닌 좋은 체격까지 함께 했던지라 한창 때는 외국인 빅맨들도 맞상대를 버거워했다. 거구의 흑인 센터가 하승진과의 몸싸움 끝에 힘에서 밀려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모습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매우 보기 힘든 장면일 수 있다.


잦은 부상 등으로 인해 전성기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롱런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플레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건강한 하승진’이라면 외국선수 포함 역대 어떤 빅맨보다도 위력적이다는데 동의한다. 실제로 데뷔 첫해 신인상을 수상하며 팀에 첫 우승을 안겨준 것을 비롯해 소속팀 KCC에 총 2번의 파이널 우승을 선물했다. 그 뒤로도 출전시간을 꾸준히 가져가는 동안에는 하승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늘 KCC는 우승후보로 꼽혔다.


하승진이 경기중 신바람이 나는 날은 상대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특유의 몰아치기는 물론 다양한 리액션을 통해 동료들의 사기까지 올려주며 경기 분위기를 확 바뀌버리기 일쑤였다. 기동성, 기술부족 등 약점도 뚜렷했으나 그것을 상쇄시킬 장점도 확실했다. 현재의 NBA에 샤킬 오닐이 등장한다면 트랜드에 관계없이 리그에 폭풍을 가져올 것이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KBL에서의 하승진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의 압도적인 빅맨이라면 변수를 상수로 만들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한창때 하승진은 그냥 외국인빅맨급이었고 문제는 딱 하나 부상여부 밖에 없었다.

◆ 하승진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47경기 출전 평균 11.6득점, 8.6리바운드, 0.6어시스트, 0.3스틸, 1.1블록슛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1년 12월 7일 안양 KGC전 = 33득점 / 어시스트 ☞ 2012년 2월 26일 서울 SK전 = 7개 / 스틸 ☞ 2015년 2월 1일 울산 모비스전 = 3개 / 블록슛 ☞ 2019년 3월 17일 창원 LG전 = 5개
 

 

스윙맨이었음에도 국내에서는 빅맨 역할을 요구받았던 김민수

하승진의 1순위 지명이 너무 당연했던 가운데 2순위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윤호영과 강병현은 중앙대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들이었다. 윤호영은 졸업반 시절 공수겸장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으며 강병현은 빼어난 기량에 더해 잘생긴 외모까지 갖춰 차세대 KBL 아이돌로 기대를 모았다.


그런가운데 윤호영, 강병현 등을 제치고 2순위를 차지한 선수는 경희대 포워드 김민수였다. 한국계 어머니를 둔 혼혈선수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그는 사이즈, 파워, 운동능력에 더해 내외곽에서 고르게 득점을 올릴 수 있었던 전천후 선수였던지라 ‘잘 성장한다면 KBL에서 외국인선수급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김민수에 대해 ‘몸싸움을 싫어하고 외곽슛을 즐기던 빅맨이다’는 의견도 많았다. 일부에서는 저평가의 이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민수는 아르헨티나에서 스몰포워드로 성장해왔다.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 갑작스럽게 빅맨 요구를 받았고 그로인해 맞지않는 옷을 입고 뛰어야만 했다.


여기에 대해 김민수는 '농구人터뷰'와의 인터뷰 당시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빅맨을 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정말 적응이 안됐다. 하지만 팀에서 원하는 역할을 해내기위해 많이 노력했다. 나름 골밑에서 열심히 싸워왔지만 몸에 배인 습관을 떨치기 어려웠다. 포스트에서 플레이하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외곽에 나와서 플레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힘은 좋은데 몸싸움을 기피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듯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SK의 김민수 지명은 중박 이상이었다. 인터뷰에서도 밝혔다시피 몸에 배인 플레이 스타일상 외곽 플레이를 같이 겸했을 뿐 외국인선수는 물론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하승진 수비도 맡은바 있다. 기술적으로 탁월한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힘이 좋아서 버티는 수비 등에 강점을 보였다. 거기에 긴 슛거리를 가지고있어 3~4번을 오갈 수 있는 전천후 포워드로서의 활용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인시절부터 한결같이 SK에서만 활약한 원클럽맨 김민수는 우승에도 공헌하는 등 2순위에 충분히 걸맞는 커리어를 남겼다.

◆ 김민수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533경기 출전 평균 10.2득점, 4.5리바운드, 1.2어시스트, 0.4스틸, 0.6블록슛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09년 3월 4일 부산 KTF전 = 37득점 / 3점슛 성공 ☞ 2019년 10월 13일 안양 KGC전 = 6개 / 리바운드 ☞ 2016년 12월 11일 안양 KGC전 = 17개 / 어시스트 ☞ 2015년 9월 19일 창원 LG전 = 9개 / 블록슛 ☞ 2014년 11월 20일 울산 모비스전 = 4개
 


‘화려한 5시즌’ 강병현과 ‘콩라인’에 운 윤호영

나란히 중앙대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윤호영과 강병현은 각각 3, 4순위로 지명됐다. 개인 커리어에서는 정규시즌 MVP까지 차지한 윤호영이 앞선다 할 수 있겠지만 대신 강병현은 첫 시즌 포함 총 2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반면 윤호영은 무려 4번이나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고도 모두 준우승에 그치며 '콩라인', '콩호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게 된다.


'리틀 김주성'이라는 별명처럼 윤호영은 김주성의 뒤를 이은 DB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김주성이 그랬던 것처럼 팀에 대한 애착이 컸으며 빼어난 공격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수비 등 궂은 일부터 앞장서는 팀 플레이어였다. 블록슛에 일가견이 있다는 점도 김주성과 비슷했다. 다만 사이즈 적인 측면에서 3번으로서는 괜찮은 편이지만 4번을 보기에는 다소 아쉬움도 있었던지라 김주성이 있는 DB에 지명된 것은 윤호영 입장에서 행운이 따랐다는 의견도 많다.


김주성이 있기에 스몰포워드로 안착할 수 있었고 외국인선수 로드 벤슨까지 더해 '원주 산성'이라 불리는 트리플 포스트의 일원으로서 맹활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얘기지만 이는 DB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윤호영같은 선수가 팀에 들어온 것은 팀으로서도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부상 등으로 인해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안양 KGC, 창원 LG시절 주로 식스맨으로 나서며 화려한 중심 선수로서의 이미지가 흐려지기는 했지만 KCC시절의 강병현은 리그 최고 2번중 한명으로 명성을 떨쳤다. 본래 전자랜드에 지명되었으나 서장훈이 팀을 옮기는 과정에서 맞트레이드 대상으로 지목되어 신인 초창기때 곧바로 KCC로 가게됐다. 사실상 KCC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고해도 무방하다.


KCC시절 강병현은 명실상부한 리그 최고의 2번중 한명이었다. KCC에서 뛰던 5시즌간 강병현은 모두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했으며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등의 세부기록 또한 이때가 가장 좋았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당시 강병현은 팀내 간판스타이기는 했지만 주포보다는 전천후 살림꾼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폭발적인 돌파에서 이어지는 드라이브인과 스탑 점프슛 그리고 과감한 클러치 성공 능력 등 을 감안했을 때 화려한 플레이에 집중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다. 수비나 보조리딩 등 궂은 일부터 앞장서는 마당쇠 마인드를 갖춘 젊은 리더였다. 팀플레이를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플레이어답게 자신의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지 팀에 도움을 줬다.

 


장신 2번으로서 1번을 도와 리딩을 돕는 것은 물론 3~4번 자리에 구멍이 생기면 직접 해당 포지션에 뛰어들어 빈자리를 채워주기도 했다. KCC 팬들 사이에서 ‘강병현은 늘 고맙고 미안한 선수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다. 어찌보면 이같은 플레이는 강병현 자신에게는 상당한 과부화로 작용하기도 했다.


원체 활동량이 많았던데다 익숙치 않은 포지션까지 소화하다 보면 체력은 물론 2번 역할에 대한 감까지 떨어지질 수 있었다. 기록적인 면에서의 손해 역시 당연했으며 그로 인해 사정을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 과소평가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외려 당시 강병현은 외국인코치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럽에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높은 명성을 쌓았던 스티브 영이 “대한민국 NO.1 슈팅가드는 강병현이다”고 말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강병현의 이같은 희생과 투혼 덕에 KCC는 그가 있는 동안 두차례나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KCC의 심장’이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그런 면에서 강병현의 갑작스런 트레이드는 팬들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당시 KCC는 ‘제 2의 허재’로 불리던 김민구를 신인드래프트에서 뽑은 상태였고 차세대 간판으로 키우려 했다. 아무래도 포지션이 같은 강병현보다는 정통 포인트가드 김태술이 서로간 호흡에서 더 낫다고 판단했고 KGC와 맞트레이드를 감행했다.


해당 트레이드에 대해 당시에는 좋은 빅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하필 상대가 강병현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워하는 팬들 또한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트레이드는 KCC와 강병현 모두에게 좋지않았다. 김민구의 음주사고 및 부상과 별개로 김태술은 새로운 팀에서 부진을 거듭했고 강병현 또한 KCC 시절 이후에는 화려했던 전성기를 되찾지못했다.

◆ 윤호영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516경기 출전 평균 7.8득점, 4.4리바운드, 2.2어시스트, 0.9스틸, 0.9블록슛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1년 1월 20일 창원 LG전 = 29득점 / 어시스트 ☞ 2019년 2월 28일 부산 KT전 = 9개 / 스틸 ☞ 2011년 2월 17일 대구 오리온스전 = 5개 / 블록슛 ☞ 2011년 11월 22일 인천 전자랜드전 = 6개

◆ 강병현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519경기 출전 평균 7.3득점, 2.4리바운드, 1.7어시스트, 0.6스틸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3년 2월 16일 고양 오리온스전 = 28득점 / 3점슛 성공 ☞ 2013년 10월 18일 안양 KGC전 = 6개 / 어시스트 ☞ 2014년 10월 15일 서울 삼성전 = 8개 / 리바운드 ☞ 2015년 10월 11일 창원 LG전 = 10개/ 스틸 ☞ 2014년 10월 15일 서울 삼성전 = 4개

차재영은 중학교 시절부터 빼어난 운동능력으로 주목받았다. 청소년대표 시절에는 국제 경기에서 외국의 장신 선수들을 상대로도 다양한 덩크슛을 꽂아댈 정도였다. 하승진을 보러온 외국 스카우터들이 '마치 흑인 선수를 보는것 같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순수하게 운동능력만 따진다면 동시대를 넘어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고려대 재학시절에는 운동능력을 앞세운 돌파와 슈팅만으로도 상대팀 수비진을 폭격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 뿐이었다. 전술 이해도가 낮고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이러한 부분은 프로에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더욱이 상무 제대 후에는 자유투에서도 약점을 드러내며 주변의 아쉬움을 산다. 자유투에서 에어볼을 기록했을 정도다. 그나마 운동능력을 앞세워 버티었으나 이후 무릎 부상까지 겹치며 겹치며 정규리그 300경기를 채우지 못하고 은퇴의 길을 밟고 만다.

◆ 차재영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265경기 출전 평균 5.1득점, 2리바운드, 0.7어시스트, 0.6스틸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08년 12월 4일 대구 오리온스전 = 28득점 / 어시스트 ☞ 2013년 11월 21일 창원 LG전 = 5개 / 리바운드 ☞ 2014년 1월 5일 전주 KCC전 = 8개/ 스틸 ☞ 2014년 1월 18일 창원 LG전 = 4개

주로 백업멤버로 뛰기는 했지만 고 정재홍은 농구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선수였다. 단신 포인트가드였지만 돌파력, 슈팅 등을 두루 갖추었으며 무엇보다 농구에 대한 배움의 의지가 강했다. 사비로 비시즌간 미국에서 스킬트레이닝을 배워왔을 정도다. 1번이 갖춰야할 여러 부분에서 고르게 준수했던지라 주전은 힘들어도 백업으로서는 쏠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쉽게도 2019년 9월 3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손목 골절로 인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하고 전날 오후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예상치못한 일이 생기며 많은 이들을 비통하게 했다.

◆ 정재홍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31경기 출전 평균 3.6득점, 1리바운드, 1.8어시스트, 0.5스틸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0년 2월 17일 전주 KCC전 = 22득점 / 3점슛 성공 ☞ 2018년 1월 11일 울산 현대모비스전 = 4개 / 어시스트 ☞ 2009년 11월 5일 안양 KT&G전 = 9개 / 리바운드 ☞ 2010년 2월 5일 전주 KCC전 = 7개/ 스틸 ☞ 2013년 2월 11일 원주 동부전 = 4개

◆ 정휘량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244경기 출전 평균 3득점, 1.5리바운드, 0.3어시스트, 0.3스틸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3년 11월 13일 창원 LG전 = 19득점 / 어시스트 ☞ 2013년 11월 1일 창원 LG전 = 4개 / 리바운드 ☞ 2013년 3월 9일 서울 삼성전 = 9개 / 스틸 ☞ 2017년 2월 7일 인천 전자랜드전 = 2개

◆ 윤여권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202경기 출전 평균 3.5득점, 0.8리바운드, 0.5어시스트, 0.3스틸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0년 11월 7일 창원 LG전 = 24득점 / 3점슛 성공 ☞ 2015년 1월 13일 전주 KCC전 = 5개 / 어시스트 ☞ 2015년 3월 1일 전주 KCC전 = 3개 / 리바운드 ☞ 2015년 1월 13일 전주 KCC전 = 5개/ 스틸 ☞ 2011년 1월 14일 안양 KT&G전 = 3개
 


로터리픽을 제외한다면 가장 성공적인 프로 커리어(이제는 과거형)을 보낸 선수는 단연 기승호(38‧194cm)였다. 공수에 걸쳐 열정적인 플레이를 보이며 신인 시절부터 꾸준한 출장기회를 받았는데 특히 적극적인 수비 능력을 인정받아 수비 5걸에도 뽑힌바 있다. 하지만 수비에 대한 마인드가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던 탓일까? 과하게 거친 플레이가 자주 나왔고 그로인해 경기중 트러블도 적지않았다. 2013~14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한 때 동료였던 문태영에게 주먹을 들이대기도 했다. 열정의 방향이 잘못된 쪽으로 표출된 케이스다.

◆ 기승호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494경기 출전 평균 6.5득점, 2.2리바운드, 0.6어시스트, 0.5스틸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3년 2월 6일 고양 오리온스전 = 30득점 / 3점슛 성공 ☞ 2019년 12월 8일 고양 오리온전 = 5개 / 어시스트 ☞ 2018년 1월 6일 부산 KT전 = 5개 / 리바운드 ☞ 2018년 11월 10일 서울 SK전 = 11개/ 스틸 ☞ 2018년 12월 14일 원주 DB전 = 5개

선수 시절 대부분을 현대모비스에서 보낸 천대현이 자신보다 앞서 지명된 선수들보다 확실하게 나은 커리어를 쌓은게 있다. 바로 우승 경력이다. 준수한 수비력을 앞세워 식스맨으로 중용되었는데 그 기간이 현대모비스의 전성기였다. 데뷔시즌 정규리그 우승, 2년차에 통합 우승을 맛보았고 상무 제대 후에는 팀 3연패를 함께 했다. 국가대표급으로 잘했음에도 연이은 준우승에 울어야했던 윤호영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 천대현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299경기 출전 평균 3득점, 1.1리바운드, 0.9어시스트, 0.5스틸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09년 2월 15일 서울 SK전 = 17득점 / 3점슛 성공 ☞ 2009년 12월 25일 원주 동부전 = 4개 / 어시스트 ☞ 2010년 3월 4일 대구 오리온전 = 5개 / 리바운드 ☞ 2009년 1월 13일 인천 전자랜드전 = 6개/ 스틸 ☞ 2013년 3월 9일 원주 동부전 = 4개

하승진은 현역 시절부터 특유의 끼가 넘치던 선수였다. 때문에 당시부터 '은퇴후 방송계의 블루칩이 될 것이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서장훈을 능가하는 활약이 기대됐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예상대로 하승진은 각종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며 넘치는 끼를 드러내고 있다. 각종 SNS 및 유투브에도 열심히다.


윤호영은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은퇴가 멀지않은 듯 싶다. 많은 나이와 잦아진 부상 등으로 잠정휴업에 가까운 상황이다. 화려한 선수 생활을 함께한 선배 김주성이 새로운 사령탑에 오른 것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주목된다.


강병현은 LG, 윤여권은 KT에서 전력 분석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정휘량은 코이티비 측에서 창단한 몬스타즈 산하 구단 '몬스타즈 FC'의 단장으로, 차재영은 경기도 평택에서 농구 교실을 운영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정현은 여자 프로농구 청주 KB 스타즈에서 코치를 맡고있으며 김민수는 경희대, 천대현은 호계중 코치로 재직중이다.


가장 씁쓸한 것은 기승호다. 적은않은 나이까지 활약하며 모범적인 선수 이미지가 강했던 그는 2021년 있었던 현대모비스 구단 회식 폭행사건을 통해 모든 것을 잃고만다. 회식자리에서 취중에 후배들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여럿이 다쳤다. 결국 재판 끝에 집행유예, 사회봉사 활동 등 폭력에 대한 처분을 받은 상태다. KBL측에서도 이를 좌시하지 않았고 영구제명이라는 철퇴가 내려졌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기승호는 농구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농구카툰 크블매니아(최감자 그림/케이비리포트 제작), 표필상 농구클럽 제공​​, KBL 제공, 문복주 기자

​​#이미지편집_김종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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