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급 10달러로 시작한 청년...佛 훈장과 28개대 명예 석·박사 받은 3개 비결 [송의달 LIVE]
“19세기가 소설의 시대라면, 20세기는 신문의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가장 영향력있는 20세기 언론 매체는 신문(新聞)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기자는 누구였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 미국의 제임스 레스턴(James Barrett Reston·1909~1995)이라고 답한다면, 이견을 제기할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레스턴은 현역 기자로 극히 드물게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 표지인물로 등장했습니다. ‘언론 : 영향력의 인물(The Press : Man of Influence)’이라는 부제를 단 1960년 2월 15일자의 구절입니다.
“민완 기자, 훌륭한 라이터(a good writer), 사려깊은 칼럼니스트, 뉴욕타임스에서 가장 큰 지국을 유능하게 이끄는 레스턴은 워싱턴DC 기자 군단(群團)에서 가장 영향력이 세다. 정치인과 동료 기자들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며 영향을 받고 있다.”
◇밑바닥 흙수저에서 最高 언론인
1939년 33세에 뉴욕타임스(NYT)에 입사한 레스턴은 1953년 워싱턴지국장에 발탁돼 11년간 재임했습니다. 1964년부터 4년은 부편집인, 1968년부터 13개월동안 편집인으로 일했고 1989년 80세 생일날 은퇴할 때까지 칼럼니스트로 활동했습니다. 그가 1954년부터 NYT에 33년간 연재한 ‘워싱턴(Washington)’ 칼럼은 세계 각국 외교관과 지식인, 언론인들의 필독(必讀) 코너였습니다.
두 차례 퓰리처상을 받은 레스턴은 1950년대에는 매주 평균 2건의 특종기사를 쓰는 ‘특종 전문가(scoop artist)’였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주는 ‘자유 메달’과 프랑스 정부의 레종 도뇌르 훈장, 28개 대학으로부터 명예 석·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레스턴은 신문기자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셈입니다.
하지만 초반 30세까지 레스턴은 정반대였습니다. 가난한 공원(工員)의 아들로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1세에 미국으로 이민 온 ‘흙수저’인데다 골프에 빠져 고교 졸업장을 간신히 받았습니다. 그는 일리노이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지만 대부분 C~D학점에 그쳤습니다.
졸업 후에는 직장을 못 구해 10달러 주급(週給)을 받는 스포츠 기자가 됐고 프로야구팀 출장 지원 홍보사원으로 활동했습니다. 30세까지 유럽 지도를 눈여겨 본 적 조차 없었습니다.
‘스코티(Scotty)’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린 레스턴은 이후 56년은 눈부신 성취로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그의 사망후 부고(訃告) 기사들은 ‘저널리즘의 거인’, ‘뉴욕타임스의 기둥’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무엇이 그의 인생을 바꾼 걸까요? 레스턴은 1991년 발간한 회고록 <데드라인(Deadline)>에서 “세 가지가 나의 생애를 지배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의 가정 교육입니다.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한 청교도적 생활 자세입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자였던 그의 부모는 집에서 카드 놀이를 일절 금지했습니다. 일요일마다 레스턴과 그의 누이를 데리고 오전과 저녁 예배를 각각 보려 2마일(약 3.2km) 거리를 두 차례 왕복해 도합 8마일씩 걸을만큼 신앙심이 돈독했습니다.
◇근면·성실한 생활...“우리의 교황”
주일(主日) 안식을 위해 그날 가족들은 토요일에 준비한 찬 음식만 먹었습니다. 레스턴도 어린 시절 목사가 될 생각을 품었습니다. 단돈 15센트를 아끼기 위해 1마일을 걸어가 싼 식품 가게에 갈 정도로 집안 전체가 검소검약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계속 가난한 상태로 있는 것은 죄이다. 자신을 개발해 성공하라(Make something of yourself!)”며 레스턴을 독려했습니다. 1927년 오하이오주(州) 고교 골프대회에서 우승하며 프로 골퍼를 희망했던 레스턴은 어머니의 강력 반대로 꿈을 접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사욕(私慾)을 뛰어넘는 큰 목적을 가져라”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부모의 간절한 설득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 및 청소년기 가정에서의 인성(人性) 교육은 평생 레스턴이 신실한 삶을 산 원동력이 됐습니다.
한창 잘 나가는 기자일 때도 그는 야간 음주 같은 밤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고 부인 이외에 여자와의 만남을 멀리 했습니다. 대신 그는 밤에 일찍 자고 오전 6시에 일어나 매일 4종류의 신문을 메모하며 정독(精讀)했습니다. 그는 오전 8시 라디오 최신 뉴스를 들은 뒤, 부인이 모는 차를 타고 오전 9시 전에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동료·후배 기자들이 출근하기 전에 그는 이미 전화 취재를 마쳐놓고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1933년부터 21년간 NYT 워싱턴지국장을 지낸 직속 상관인 아서 크록(Arthur Krock)은 “레스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지런하다(He is industrious beyond belief)”고 격찬했습니다.
레스턴은 한 명의 여성과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했고 세 명의 아들을 각기 국무부 차관보, 작가, 언론인으로 키웠습니다. 그는 가까운 지인(知人)들로부터 ‘우리의 스코틀랜드 교황(Our Scottish Pope)’으로 불렸습니다.
‘캘빈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입각해 레스턴이 쓰는 칼럼들은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올바른 생각을 하는 정의로운 국가이다. 신(神)은 미국 편에 있다’는 건강하고 명징한 논리를 설파했습니다. 냉소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그는 ‘이상(理想)’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대학 4학년때 만나 평생 반려자가 된 사라 제인 풀턴(Sarah Jane Fulton·약칭 샐리 Sally)입니다. 레스턴 보다 나이는 세 살, 학년은 2년 어린 샐리는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은 최우등생으로 지성(知性)과 미모를 갖춘 재원(才媛)이었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아버지가 일리노이주 대법원장을 두 번 지낸 명문가였지요.
◇부인의 ‘교육’... “나는 읽고 읽고 또 읽었다”
1935년 결혼해 60년간 해로(偕老)한 샐리에 대해 레스턴은 “그녀는 나와 결혼했을 뿐 아니라 나를 ‘교육’시켰다. 그녀는 사안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한 예로 레스턴은 경청(傾聽)의 대가(大家)였는데, “어떻게 그런 기술을 익혔느냐”는 질문에 레스턴은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글쌔 나는 좋은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당신은 너무 말을 많이 한다. 상대방이 뭔가 말하려 할 때, 당신은 말을 끊어버린다. 그러지 말고 항상 끝까지 경청하라’고 당부했다.”
샐리와의 결혼 후 안정감과 자신감을 얻은 레스턴은 가치로운 야망(野望)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직장인 <스프링필드 데일리 뉴스(Springfield Daily News)> 지역신문에서 주급(週給) 10달러를 받는 스포츠 기자에서 차근차근 상승 사다리를 밟으며 올라갔습니다.
주급 40달러의 오하이오주립대 스포츠홍보팀장→프로야구 신시내티 레즈(Cincinnati Reds) 출장 홍보사원(주급 75달러)→AP통신 뉴욕지국(월급 175달러)→AP통신 런던지국 기자를 거쳐 1939년 9월 선망(羨望)하던 NYT 기자가 됐습니다.
레스턴은 아내 샐리에 대한 지적(知的) 열등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소흘히 할 수 없었습니다. 집 안에서도 책을 즐겨 읽은 그는 “NYT 입사 후 20년간 소설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러나 업무에 도움되는 논픽션(non fiction)은 빼놓지 않고 나는 읽고, 읽고, 또 읽었다(I had read, read, read)”고 했습니다.
덕분에 레스턴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대중적 인기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미국사회의 문제점을 로마제국의 흥망성쇠와 연결시키는 칼럼을 자유자재로 쓰는 지성인이 됐습니다.
샐리는 당초 잘 난 척 하지 않고 겸손한 레스턴의 성품에 더 좋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녀는 “아무리 막강한 권력자나 똑똑한 지식인이라도 집 안에 고민거리를 갖고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며 “용서하고 관대하라”고 레스턴에게 늘 깨우쳐 주었습니다.
1961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후르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단독 정상회담에서 고성(高聲)을 나누며 충돌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0분쯤후 비엔나 미국대사관에 돌아와 제임스 레스턴을 비밀리에 만나 회담 내용과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털어놓았습니다. 취재원의 지위 고하(高下)를 떠나 상대방에게 편안함과 신뢰감을 주는 ‘특별한 기자’가 바로 레스턴이었기 때문입니다.
◇NYT의 상징... 미국에 대한 감사·자부심
세 번째는 뉴욕타임스와 레스턴간의 환상적인 조화(調和)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에 침공한 날, NYT 런던지국에 입사한 레스턴은 독일 나찌스가 런던을 60일 가까이 연속 야간 공습하는 전쟁 상황을 죽음을 무릅쓰고 지켰습니다.
쉽고 담담하고 명쾌한 현장 기사로 이름을 날린 레스턴은 미국으로 돌아와 33세이던 1942년 여름 <승리로 가는 서곡(Prelude to Victory)>이란 첫 저서를 출간해 더 유명해졌습니다. 9개월 동안 NYT의 사주(社主)인 아서 헤이즈 설즈버거(AHS) 발행인의 비서로 근무한 뒤 1943년 워싱턴지국에 배속돼 발군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2차 세계대전후 국제연합(UN) 구조를 논의하기 위해 1944년 8월 워싱턴DC 덤버튼오크스 회담에 참가한 미국·영국·소련·중국 4개국의 입장문 전문(全文)을 단독 입수·보도한 게 대표적입니다. 이 보도로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은 그는 연이은 특종기사와 기존과 차별화된 새로운 기사 방식으로 미국 언론계에서 우상(偶像)으로 떠올랐습니다.
1960년에는 연봉 4만달러에 1회당 1000달러의 강연료를 받는 최고의 스타 기자가 됐습니다. 젊은 미국 기자들이 레스턴 밑에서 근무하기를 대거 갈망하는 바람에, 레스턴의 상징인 파이프 담배와 나비 넥타이, 버튼다운 셔츠, 목소리와 걸음걸이까지 따라하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필 그레이엄 발행인 겸 사장은 3차례 레스턴을 스카웃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레스턴의 취재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취재원 입장이 돼 중요 이슈를 공부해 기사 방향을 예견한 뒤 그 주변을 집중 취재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는 “신문 기사를 꼼꼼히 읽고 의문을 품어라. 정부 또는 연방의원이 무엇을 할 것인지 예상하고 그 바탕 위에서 추적하고 취재해라”고 강조했습니다.
조각 정보들을 모아 얼개를 갖춘 다음, 취재원에게 장문(長文)의 기사를 쓰겠다고 전화로 엄포를 놓는 수법도 썼습니다. 레스턴은 ‘워싱턴DC에서 가장 멋진 엄포쟁이’(the finest bluffer), ‘전화 취재의 달인’(A Great Phone Man), ‘워싱턴 속사정에 가장 정통한 인물’(Ultimate Washington Insider)’로 불렸습니다.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은 레스턴의 취재 기법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레스턴은 공격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매우 공격적이었다. 전화 취재에 탁월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결코 기사거리를 바라는 톤(tone)이 아니었다. 몇마디 후 한참동안 침묵함으로써 그는 항상 급하지 않고 여유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동시에 믿어도 된다는 느낌도 줬다.”
‘진지한 신문’인 NYT와 사려깊은 성격의 레스턴은 상승 효과를 냈습니다. 레스턴의 가치관과 신념, 논조는 NYT와 고순도(高純度)로 일치했습니다. “레스턴에게 좋은 것이 NYT에도 좋다”(언론학자 존 스택스·John Stacks)가 진리가 된 것입니다.
평생 자신의 가난한 초년기를 잊지 않았던 레스턴은 ‘기회의 땅’ 미국에 대한 감사와 자부심으로 충만했습니다. 이는 애국주의에 입각한 미국 옹호자로서 미국 체제의 건강한 영속(永續)을 위해 언론인이 ‘책임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발현됐습니다.
◇기업·스포츠·문화 이어 한국인 ‘세계적 大記者’는?
레스턴은 소셜 미디어(SNS)가 범람하고 디지털 문명이 고도화하는 요즘 환경에 맞지 않는 구식(舊式) 인물입니다. 당시의 취재 방식은 지금 적용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레스턴은 21세기 언론에 살아있는 전범(典範)입니다. 단순 사실(事實) 보도를 넘어 현대 분석적 보도(interpretive reporting)의 선구자로서 신문기자라는 직업이 진지하고 존경받는 직업(serious and respected profession)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스스로 앞장선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는 좋은 교육을 받은 우수한 기자들이 더 숭고한 목적을 갖고 일함으로써 저널리즘의 수준이 높아지길 원했습니다. 레스턴은 지엽적인 사안 보다 큰 이슈에 집중했고, 평범한 사건들에서 새로운 의미(意味)를 발견·부여하는데 탁월했습니다.
그는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4번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1971년 8월 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선 주은래(周恩來) 중국 총리와 5시간 단독회견했습니다.
한 마디로 레스턴은 세계 정상급 정치인·대학자와 맞붙어도 손색없는 대기자(大記者)였습니다. 국적(國籍)과 시·공간은 다르지만, 21세기 한국에서도 레스턴을 능가하는 정신과 기백, 실력을 갖춘 언론인들이 많이 나오길 소망합니다. 기업, 스포츠, 음악·영화 방면에서 활약했거나 활동 중인 여러 세계적 한국인들을 감안하면, 이는 ‘몽상(夢想)’이 아닐 것입니다.
※참고한 자료
James Reston, Deadline : A Memoir (1991), David Halberstam, The Powers That Be (2000/1975), Gay Talese, The Kingdom and the Power (2007/1966), John Stacks, Scotty : James B. Reston & the Rise and Fall of American Journalism(2003), The Harvard Crimson, The New York Times, TIME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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