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많았소, 여보”… 노배우의 가슴이 다시 뛰었다

이태훈 기자 2023. 4.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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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이해랑연극상 배우 김재건
“늙지 않는 진심으로 연기할 것”
특별상은 춘천인형극제 수상
올해 제33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김재건 배우와 특별상을 받은 재단법인 춘천인형극제의 조현산 이사장. /박상훈 기자

“항상….” 제33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김재건(76) 배우가 잠시 수상 소감을 멈추고 눈물을 닦았다. “…늘 내 편으로 오랜 세월 곁에 있어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연극 배우의 배우자, 쉬운 일 아니었을 거예요. 적은 생활비로 가족 이끌어가기 힘들어 피아노 학원 차리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면서 절 연극 하게 해줬습니다. 그동안 고맙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이 자리 빌려서 얘기할게요. 고생 많았어요, 여보.”

17일 오후 5시 서울 정동 조선일보 편집동에서 열린 시상식은 한 편의 연극 무대같았다. 뜨거운 눈물, 열띤 환호, 유쾌한 폭소가 엇갈리며 이어졌다. 고단했던 코로나 터널을 이제야 빠져나온 연극인과 내외빈 400여 명이 함께 울고 웃었다.

이해랑연극재단(이사장 이방주)과 조선일보사가 운영하는 이해랑연극상은 연출가 이해랑(1916~1989) 선생이 추구한 리얼리즘 연극 정신을 이어가는 국내 최고 연극상. 수상자 김재건 배우가 학창 시절 서울 중동고 연극반원으로 참가했던 전국고교연극대회 심사위원들에게 감사를 전할 땐 장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은행에 계셨던 아버지는 무슨 연극이냐며 말리셨죠. 아버지와 내기를 했습니다. 연극경연 나가서 연기상 타면 연극 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상 탈 만한 배역이 아니었는데 제게 연기상을 주셨어요. 그 덕분에 오늘날 이 자리까지 섰습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 앞에 선 제33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김재건 배우. /남강호 기자

김재건은 서울예대를 나온 뒤 동랑 레퍼토리 극단을 거쳐 1970년 이동극장 단원으로 이해랑 선생께 배우며 활동했다. 1972년 연기인 양성소 5기로 들어갔던 국립극단에서 2010년까지 ‘사로잡힌 영혼’ ‘태(胎)’ ‘피고지고 피고지고’ 등 100편 넘는 무대에 올랐고, 국립극단을 나온 뒤에도 매년 4편 이상 연극을 했다.

그는 “과연 이 자리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일까 늘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다. 오랜 세월 연극하길 잘했다 싶다”고도 했다. “지난 50년 무대 인생에서 만난 모든 분이 스승이었습니다. 다시 깊이 고개 숙입니다. 오늘 이 상으로 주신 격려가 노배우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합니다. 뭐든 주어지는 역할을 절대 늙지 않는 진심으로 연기하겠습니다.”

김재건 배우에게 트로피와 상금 7000만원을 수여한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열정과 성실로 이뤄낸 성취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청춘을 연극에 바치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격려와 자극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사회를 맡은 손숙 배우가 말했다. “김재건씨, 아시죠. 그 상금은 부인한테 드리는 거예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제33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배우 김재건과 특별상을 받은 재단법인 춘천인형극제 조현산 이사장이 17일 오후 5시 서울 정동 조선일보 편집동에서 열린 시상식의 참석자들과 함께했다. 왼쪽부터 이방주 이해랑연극재단 이사장, 배우 손봉숙, 이호재 운영위원,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수상자 김재건·조현산, 정동환 심사위원장, 손숙 운영위원, 배우 박정자, 연출가 손진책, 이태섭 심사위원. /박상훈 기자

정동환 심사위원장은 “스타였을 때도 전성기였을 때도 없었지만 어디에나 있는 분이었고, 무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연기는 선(禪)의 경지”라고 했다. “이해랑 선생이 ‘뇌우’를 연출하셨을 때 김재건 선배가 무대에 있는 걸 보니 이해랑 선생이 무대에 올라가 계신 것 같았어요. 다들 스타를 뒤쫓는 세상이지만, 진짜 살아있는 연기자란 이런 분입니다.”

극단 공상집단뚱단지의 문삼화 연출가는 축사에서 “화려하지 않지만 누군가의 뒤에서 더 빛나는 자신만의 연기세계를 구축하신, 과연 이 상을 받을 만한 분” 이라고 했다. “무대 위에서 해맑음과 사악함을 넘나드는,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작고 가는 눈을 갖고 계시죠. 선생님을 보면 꿋꿋이 풍파를 견딘 반 고흐 그림 속 나무가 생각납니다. 잰걸음으로 연습장과 공연장을 오가느라 바쁘신 중에 까마득한 후배들 공연까지 보러 오시는 것도 감사한데, 공연 끝나면 술까지 사주십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하객들은 또 폭소를 터뜨렸다.

2023년 올해 제33회 이해랑연극상 특별상을 받은 재단법인 춘천인형극제의 조현산 이사장이 춘천인형극장 앞에 서서 활짝 웃고 있다. /이진한기자

올해 특별상 수상자인 재단법인 춘천인형극제를 대표해 조현산(54) 이사장이 상을 받을 땐 또 한 번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인형극제 마스코트 ‘코코바우’ 인형이 등장해 함께 상을 받은 것. 1989년 춘천 공지천변에서 시작한 춘천인형극제는 2001년 재단법인화와 인형극 전용극장 건립을 거치며 35년을 이어졌다. 이제 춘천은 한국 인형극의 ‘메카’로, 춘천인형극제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첫손에 꼽히는 축제로 성장했다. 우리 인형극인들은 ‘인형극 올림픽’으로 불리는 2025년 세계인형극연맹(UNIMA·유니마) 총회 유치라는 쾌거도 이뤘다.

조 이사장은 “올해 35회를 맞는 춘천인형극제는 이제 어릴적 축제를 본 관객이 어른이 돼 자녀와 함께 찾아와 즐기는 축제가 됐다”며 “춘천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관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관객에겐 즐거움과 기쁨, 공연 예술 창작자들에겐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또 예술의 씨앗을 심는 축제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배우 손숙이 사회를 본 이날 시상식에는 김윤철·이호재씨 등 이해랑연극상 운영위원, 정동환 위원장과 이태섭·이상우씨 등 심사위원, 손진책·박정자·김삼일·박동우·손봉숙·길해연 등 역대 수상자, 이한승 극단 실험극장 대표와 오현경·정상철 등 연극인, 이해랑 선생의 가족인 이방주 이해랑연극재단 이사장과 이석주·이은숙씨, 차혜영 차범석연극재단 이사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 김문순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 이사장, 홍준호 조선일보 발행인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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