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후 야외교실… 원조 받은 ‘유네스코 산수책’을 폈다
케네디 동생이 도서관서 찾은 옛 추억 건넸다… “JFK가 JFK를 만났군”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하고 출범한 대한민국이 올해 75주년을 맞는다. 식민 지배 질곡에서 겨우 벗어난 신생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 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보물은 박물관에만 있지 않다. 값비싸고 진귀한 것일 필요도 없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개인의 기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깃들어 있다. 그런 보물을 거울 삼아 지난 75년을 돌아보고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
“금번에 유네스코와, 운끄라에서 인쇄 기계의 기증을 받아, 국정교과서 인쇄 전속 공장이 새로 생겼는 바, 이 책은 그 공장에서 박은 것이다.”
1954년 유네스코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이 한국 교육 재건을 위해 10만달러를 들여 서울 영등포(현 동작구 대방동 502)에 교과서 공장을 설립했다. 이 공장에서 단기 4289년(1956) 발행한 국민학교 6학년 2학기 산수 교과서 뒤표지 안쪽엔 그 사실을 알리는 글이 적혀 있다. 이렇게 원조받은 교과서로 공부한 어린이 중엔 그해 충주 교현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반기문도 있었다. 훗날 유엔 사무총장이 된 그는 저서에서 당시 쓰던 모든 교과서 마지막에 유네스코·UNKRA의 원조를 언급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며 “진심으로 두 기관에 고마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만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956년 산수 교과서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아프리카 국가에 가 보니 학교가 없어요.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유엔 총회에서 얘길 했죠. 전쟁으로 교실이 파괴돼서 더운 날엔 나무 밑에서 공부하고 비 오면 그냥 집에서 놀았다고요. 그래도 우린 공부하겠다는 열정이 있었다고 했지요.”
연설을 접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 영등포 공장에서 찍은 교과서 3권을 찾아냈다. 국민학교 ‘자연’ 등 2권은 2012년 한국을 방문한 이리나 보코바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전달했고 현재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있다. 반 전 총장에게 선물한 나머지 1권이 충북 음성 반기문평화기념관에 소장된 이 산수 교과서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준다. 반 전 총장은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했다. 한국은 그의 임기 중인 2009년 원조 선진국 클럽으로 통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DAC(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했다. 반 전 총장은 “자랑스러우면서도 여러 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는 입장에서 면이 서질 않았다”고 했다. 유엔이 권고하는 원조 규모가 국민총소득(GNI) 대비 0.7%인데 OECD 평균이 0.33%, 우리는 0.16%(2021년 기준) 수준이어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외교관의 꿈 심어준 케네디
1962년 8월 29일 충주고 3학년생 반기문군(사진 점선 안)은 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JFK) 대통령을 만났다. 청소년적십자국제대회 한국 대표로 선발돼 한 달간 미국 문화를 체험한 일정의 하이라이트였다. 반기문 등 한국 대표 4명을 포함해 43국 117명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때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에 속했다. 1인당 GNI가 120달러로 수단(140달러)이나 가나(190달러)보다도 낮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1인당 GNI는 2021년 3만4980달러로 1962년의 약 291배가 됐다.
2006년 유엔 사무총장 당선 직후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 미 상원 의원이 그를 찾아와 1962년의 사진을 선물했다. 보스턴의 JFK 기념 도서관을 뒤져 찾아낸 사진이었다. 케네디 의원은 축하 카드에 ‘J.F.K. meets J.F.K.(JFK가 JFK를 만나다)’라고 적었다.(②번 사진 아래)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유학 시절 반 전 총장의 별명이었던 JFK(Just From Korea·한국에서 막 왔다는 뜻)를 재치 있게 언급했다. 케네디 대통령과 만난 일은 반 전 총장이 세계에 도움 손길을 내미는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케네디는 학생들 앞에서 “지도자들끼리 대화하지 않는 나라들도 국민은 서로 교류하며, 돕는 손길을 내미는 데는 국경이 없다”고 연설했다. 반 전 총장은 “냉전이 한창이었는데 국경이 없다는 말이 놀라웠다”고 했다.
반기문군의 미국행을 앞두고 충주여고 학생들이 미국인들에게 줄 선물로 복주머니를 만들었다. 이걸 모아 전달해 준 사람이 충주여고 학생회장이었던 아내 유순택 여사다. 반 전 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헌신적인 아내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고 했다. 지난 2017년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지 20일 만에 불출마 선언을 했던 것도 “아내하고만 상의해서 내린 결정”이라며 “국회에서 발표할 때까지 캠프 인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기후 대응 선도 국가로”
반기문 전 총장은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성사시킨 것을 대표적 업적으로 꼽는다. “기후 문제에 대해선 잘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사무총장이 되고 보니 가장 심각한 문제가 기후변화였습니다.” 파리협약은 세계 195국이 온실가스 감축에 동참하기로 합의한 신(新)기후 체제다. 반 전 총장은 “기후 문제를 논의할 때 헌법과 같은 기초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해관계가 각기 다른 세계 정상들을 설득해 협약 타결을 이끌었다. 2015년 백악관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기후 위기에 대해 논의한 뒤 직접 쓴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덕은 물과 같다)’ 휘호를 생일 선물로 전달한 일도 유명하다. 총장 선거운동을 하면서 “북극과 남극 빼고 웬만한 나라는 다 가본 것 같다”고 했던 그는 취임 후 기후변화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북극을 4회, 남극을 1회 방문했다.
파리협약의 핵심은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을 섭씨 1.5도 이내로 통제하자는 것이다.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반 전 총장은 “목표를 높이 잡아야 한다”면서 “대한민국이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목표를 높이 잡는 데는 소질이 있잖아요? 미리 안 된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터뷰 말미엔 정의(正義)라는 가치에 입각해 국제 현안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특히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대표적 사례로 북한을 들면서 “북한 문제를 민족 문제로 해결할 것인지, 국제법적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지를 분명히 정해야 한다”고 했다. “민족 감정에서 하는 접근은 이미 테스트가 된 겁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이 시도했고 우리가 세 번이나 속았죠. 그렇다면 이제는 ‘차가운 머리’로 접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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