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눈치껏 빠져줘야 했던 존재
‘아. 바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만큼 무겁구나.’ 버스에 온몸이 깔렸을 때 느꼈다. 교통사고였다. 너무 이른 출근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어두운 새벽에 운전하던 버스기사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놓쳐 그대로 삼켰다.
첫 직장 출근길이었다. 장애를 이유로 수차례의 면접에서 떨어진 뒤, 겨우 뽑힌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면접 당시 열심히 일하는 인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출근은 열심일 수 없었다. 인파로 가득 찬 지하철은 ‘목발’을 태우지 않은 채로 번번이 스쳐갔다. 어김없이 내 앞에서 끊어지는 탑승 행렬을 보며 겸연쩍게 웃으며 먼저 가시라고 손 흔들었다. 휠체어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새벽녘 혜화동을 걷다가 사고가 났을 때, 무거운 자동차 바퀴가 척추를 짓누를 때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 죽을 거면 결혼하지 말 걸. 둘, 새벽길에 출근하지 말 걸.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말 나와 1년 전 결혼한 상대에게 미안했고, 캄캄한 새벽에 횡단보도를 건너기로 한 결정이 후회스러웠다. 새 가족과 새 직장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 싶어 나섰던 출근길이 죽음길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모든 게 공허해졌다. ‘남은 가족을 잘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지인에게 남긴 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버스 탑승 중이던 승객과 지나가던 행인이 급히 차를 세우고 내 몸을 꺼내어 살아남았다지만, 나는 장면이 기억나질 않는다.
며칠간의 중환자실 치료 속 간신히 되살아났지만, 척수 장애는 악화되었다. 내 몸은 신경통이 흐르는 지뢰밭이 되었다. 나 홀로 충성을 맹세했던 첫 직장은 그만두어야만 했고, 수입은 끊겼으며, 한참 동안 이어진 치료비는 나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장애인이 출근길에 경험하는 재난 이야기는 비단 나만의 사연은 아니다. 대다수 장애인은 정시에 출퇴근하는 직장을 감히 꿈꿀 수 없다. 이동할 수 없으니 교육받을 수 없고, 교육받을 수 없으니 취업할 수 없는 차별의 역사가 낳은 귀결이기도 하지만, 출근길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현재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수년째 출근길 지하철 타기 운동에 참여하는 60대 장애 여성 이형숙 활동가는 과거 자신을 ‘눈치껏 빠져줘야 했던’ 존재라고 말했다. 30대의 두 딸과 손자를 둔 할머니 이형숙은 20년 전 장애인운동을 계기로 세상에 나오기로 한 때부터 지하철 타는 출근길을 꿈꿨다. 그러나 그 꿈은 수십년째 실현될 수 없었다. 그의 ‘못된’ 휠체어는 예나 지금이나 ‘선량한’ 시민들의 출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눈치껏 빠져줘야만 했다. 사회가 그에게 요구한 선의는 그가 집밖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장애인만 출근하지 않는다면, 모두의 출근길이 행복해질 거라는 설득은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장애 여성은 자기 앞에 무정차 통과하는 출근길에 끊임없이 나선다. 눈총과 욕설을 마주하면서도 꿋꿋이 휠체어로 지하철을 타려 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앞으로 장애인이 되고 노약자가 되면 꼭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십시오. 당신들이 그 권리를 누릴 때 그 현장에서 피눈물을 가슴에 안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십시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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