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도 칼럼] 형평운동 100주년과 소 잡는 칼
요즘 화두인 공정은 요원, 수평적 관계·화합 모색을
‘진주 100년 형평’. 경남 진주시청 앞 도로에 내걸린 알림막 글귀다. 봄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토요일, 남해고속도로 문산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진주종합경기장과 진주시청을 지나는 동진로 앙쪽에 이런 길쭉한 알림막이 도열하듯 걸렸다. 주황색 바탕으로 두 개가 한 쌍이며 하나는 기념식, 다른 하나는 특집 음악회를 알린다. 진주시는 오는 24일부터 30일까지를 ‘형평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벌인다. 기념식과 특집 음악회는 25일 열린다.
‘진주 형평운동 100주년’을 상징하는 알림막은 오랜만의 진주 나들이 1차 목적지가 형평운동기념탑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기념탑에 도착했을 땐 날씨도 화창하게 개었다. 대숲인 남가람별빛길과 경남문화예술회관이 기념탑과 이웃하고 있었다. 대숲을 따라 내려가 문화회관까지 연결되는 남강변 잔디밭 곳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젊은이들 표정이 밝았다.
형평운동기념탑은 ‘인간존엄 인간사랑’ ‘자유평등 형평정신’을 새겨 그 뜻을 하늘로 펼치듯 곧추선 석조 조형물, 이를 실현하려는 굳은 의지로 두 손을 맞잡은 남녀 동상, 조형물과 동상을 호위하는 두 돌기둥, 그리고 표지석으로 이뤄졌다. 표지석엔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는 글귀가 뚜렷했다.
형평운동은 꼭 100년 전 진주에서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이다. 세상 모든 사람의 자유 평등 존엄이 인권이라면, 출생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이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을 얻으려는 노력이 인권운동이다. 세계인권선언이 주장하는 바이다. 운동은 차별과 불평등을 깨뜨리고자 뭉친 힘이다. 100년 전에도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남강 물이었겠으나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으며, 이들에게 곁을 내준 이들도 있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남강이 일깨워주는 형평운동의 취지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가 조직됐다.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단체다. 그 바탕이 가장 천대받던 백정이었다. 아무리 소를 잡고 고기를 다루는 일을 하더라도 대접이 말이 아니었다. 사는 곳부터 제한을 받았으며 호적에 오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혼인은 백정끼리만 가능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멸시와 차별이 이어졌다. 뿌리깊은 악습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반인륜적이며 불평등한 신분제도가 형식적으로 사라졌다고는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로부터 29년 만에 백정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낸 것이다. 1919년 3·1운동과 백정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변화가 큰 몫을 했다.
그 전후로 진주가 겪은 역사의 고비마다 역할을 한 사람들의 족적이 만만찮다. 1862년 진주농민항쟁과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거쳐 1909년엔 진주교회에서 백정이 일반 신도와 함께 예배를 올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진주교회엔 ‘진주에서 최초로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함께 예배 본 교회’라는 안내판이 있다. ‘신분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선 역사적인 일’에 스콜스와 켈리라는 두 여성 선교사가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차별이 없다’며 나섰다. 형평사 조직엔 강상호 신현수 등 지식인이 장지필 이학찬 등 백정과 의기투합했다. 특히 강상호 신현수 등은 ‘새백정’이라는 힐난을 들으면서도 올곧은 뜻을 이어갔다. 형평사가 깃발을 세운 형평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백정이 무슨’ 하는 터부 속에 1935년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래 취지를 잃었다.
진주 나들이는 형평운동기념탑과 진주교회, 형평사 시발점 언저리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진주를 빠져나와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은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는 우중충한 날씨였다. 100년 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진주의 역사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임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와 정치적 견해 또는 그 밖의 견해, 출신 민족 또는 사회적 신분, 재산의 많고 적음, 출생 또는 그 밖의 지위에 따른 그 어떤 구분도 없이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세계인권선언에 고개를 끄덕이기엔 우리나라 현실이 녹록지 않다. 갈수록 심해지는 경제적 불평등과 새로운 차별이 심각하다. 공평은 우리 사회의 화두인 공정과, 애정은 약자와 함께 가자는 취지와 다를 바 없다. 공자가 제자인 자유에게 했다는 말, ‘닭 잡는 데 왜 소 잡는 칼을 쓰느냐’(‘논어’ 양화편)를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자칫 잘못 이해하기 십상인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 사회의 기본인 수평적 인간 관계, 화합의 정신이다. 소 잡는 칼에 담긴 의미다.
사람 사는 이치는 25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지금 우리가 소 잡는 칼을 써야 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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