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이종격투기장’이 된 여의도
외교안보 정책에 있어 최근 이 정권의 이해할 수 없는 난맥상은 윤석열 대통령을 ‘나쁜 가부장’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드라마나 소설에 가끔 나오는 캐릭터다. 밖에 나가서 하는 걸 보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호인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걸핏하면 “동맹을 흔들지 말라”며 화를 내고 윽박지르는 무서운 아버지다. “그렇게 다 퍼주면 우린 뭐 먹고 사느냐”는 항변은 꿈도 꾸지 못한다. 왜 나를 가장으로 인정해주지 않느냐며 전 정권 얘길 또 꺼낼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 지지율의 하락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이렇게 비춰진 탓이 클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 전 대통령은 ‘2차 국정과제 점검회의’를 직접 주재했는데, 한·일 외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직접 설득하려는 전략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이러한 취지에 걸맞게 각 부처에서 선정한 국민 대표, 외교안보 전문가 등과의 질의응답도 예고됐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왜인지 비공개였다. 이 자리의 전문가들은 정권과 비슷한 의견인 사람들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질의와 응답이 오갔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럴 게 아니라 ‘반대파’를 불러다 놓고 대통령이 어떻게든 이들을 설득하려고 애를 쓰면서 합리적 지적은 수용하고, 잘못은 인정하는 모습을 생중계했다면 어땠을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확 달라졌을 거다. 여당 장악을 위해 갖은 애를 쓰고 국회를 향해선 “나에겐 거부권이 있다!”며 눈을 부라리는 게 아니라 야당 대표를 만나 고개 숙여 부탁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제1야당이 큰 역풍을 맞았을 거다.
대통령이 이런 선택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이유는 뭘까? 더 편한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제1야당 소속 정치인들의 검찰 수사와 재판이 예고돼 있는데 굳이 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 못난 적은 곧 아군이다. 이건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처리 이후 ‘사법리스크’ 국면에 대한 출구전략을 논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한·일 정상회담의 충격 이후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란 식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정권과 여당이 알아서 죽을 쑤는데 스스로 변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는 거다.
그러다 이제 ‘돈봉투 전당대회’ 의혹으로 다시 호떡집에 불난 듯하는데, 진작에 혁신 논의를 진행해왔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을지 모를 일이다. “이번 기회에 퇴행적 정치 문화를 모조리 솎아내겠다” “혁신적인 공천으로 돌파하겠다” “이를 위해서라면 대표직에 연연하지 않겠다”, 이런 메시지를 진작에 앞세웠다면 국민들은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다시 봤을 것이다.
남의 잘못을 나의 존재 의의로 삼다가 자기 꾀에 걸려 넘어지는 이러한 ‘남 탓 정치’는 조금이라도 정치적 이익을 볼 수 있다면 ‘해야 할 바’를 외면하고 노골적인 흙탕물 싸움을 꺼리지 않는 정치공학이 기본 동력이다. ‘우리 편’끼리는 다 양해가 되지만 ‘남의 편’이 볼 때는 말이 안 되고 지나치다. 그래도 다들 ‘공자님 말씀’만 하고 있는 때라면 이런 것도 효과적인 변칙 전술로 평가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이를 넘어 ‘변칙’은 이제 ‘필승전략’으로 정치 전반을 지배하게 됐고, 이 덕에 여의도는 정치적 이종격투기 경기의 특설 무대 같은 곳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게 바람직한가?
정치공학으로 논하더라도, ‘변칙’이 누구나 쓰는 ‘필승전략’이 되었다면 그건 더 이상 변칙일 수 없다. 이걸 깨기 위해서는 전술적 유연성을 한 번 더 발휘해야 한다. 다시 ‘정공법’을 꺼내들 때인 거다. ‘더티 플레이’로 1점 내는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해야 할 바’를 하는 정치 말이다. ‘정공법’이 유연한 접근이 되는 세상인 게 기가 막히지만, 어쩔 수 없잖은가.
김민하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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