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전문직이 존중을 얻는 방법

기자 2023. 4. 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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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피해자 유족의 손해배상 소송을 수임한 변호사가 변론기일에 연달아 출석하지 않아 소 취하가 되도록 하고, 이를 의뢰인에게 숨긴 일이 있었다. 직업윤리의 가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사건이다.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기일을 알려주고 기일에 반드시 출석한 다음 진행사항을 보고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든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될 리 없고, 변호사가 기일에 나타나지 않으면 재판부가 당사자의 연락처를 파악해서 알려주도록 할 수도 없다. 변호사가 어떤 사건을 수임하면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해 기준을 정해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이건 규칙이나 가이드라인으로 해결되지 않는 전문직의 윤리 문제다.

유정훈 변호사

변호사·의사 같은 전문직은 전문 분야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국가에서 공인하는 자격증을 취득해야 수행할 수 있다. 해당 직역에 대한 법적 진입장벽이 있기에 어느 정도 독점적 지위가 보장된다. 변호사의 경우 정부 당국이 아닌 대한변호사협회에 징계권이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자율적 지위까지 인정받는다.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가 당연히 요구된다.

‘윤리’라는 표현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는 선악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도 아니고, 전문직 개인의 도덕성이나 인성을 따져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전문직의 본질에 부합하여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직업윤리일 뿐이다. 변호사가 의뢰인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다른 사건을 수임하면 안 된다거나, 의사가 진료 요구를 받을 때 원칙적으로 이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개별 국가와 문화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문직 윤리에는 보편적으로 확립된 내용들이 있다. 누구라도 대부분 납득할 수 있고, 지키기가 어려운 일도 아니며,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문직의 윤리는 업무 수행에 대한 부가적 규제가 아니라, 전문직이 그 전문성을 발휘하는 전제이자 방법이다. 변호사에겐 의뢰인의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다. 의뢰인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측면도 있지만, 비밀이 보장되어야 의뢰인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는 제도적 효과 역시 고려해야 한다. 변호사가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간다는 신뢰가 없어 의뢰인이 온전한 사실을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변호사라도 적확한 법률자문을 할 수 없다. 대한의사협회 의사윤리지침에 의하면 의사는 환자의 인종과 민족, 나이와 성별, 직업과 직위, 경제상태, 사상과 종교, 사회적 평판 등을 이유로 의료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특정 환자에 대한 진료를 거부한다면 전문 지식과 기술이 무슨 소용인가.

전문직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전문성이 아니라 윤리와 책임이다. 전문 지식과 기술은 계속 변화하고 다른 사람이나 수단으로 대체 가능하지만, 윤리와 책임은 그렇지 않다. 엄격한 직업윤리를 전제로 업무를 수행하고 전문적 판단에 대해 책임을 지기 때문에 전문직으로 인정되는 것이지, 특정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해서 전문직은 아닌 것이다.

변호사가 실력만 있으면 그만이지 윤리적인지는 알 바 아니라는 생각, 어려운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의사의 실력이 중요하지 윤리가 무슨 소용이냐 하는 질문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나 할 법한 얘기다. 전문직의 윤리와 전문성이 그렇게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력은 최고지만 직업윤리는 파탄 상태인 전문직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나아가 전문직에게는 스스로 윤리를 준수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속한 집단과 동료까지 윤리를 지키도록 노력할 책무가 있다. 이익단체에 불과한 변호사협회에 모든 변호사가 가입하도록 강제하고 징계권까지 부여한 것은 ‘문제 있는 일부의 일탈’이라는 핑계를 대지 말라는 뜻이다. 전문직 윤리를 지키도록 관리하고, 지키지 않으면 제재하고, 전문직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사람은 쫓아내는 것이 스스로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모든 전문직은 전문적 판단에 대한 존중을 갈구한다. 하지만 전문직에 대한 신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해야 하고, 이를 얻기 위한 핵심은 윤리와 책임이다. 의뢰인의 일생일대 소송을 날린 변호사가 다시 변호사 업무를 할 수 있다면,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의 자격조차 박탈할 수 없다면, 사회의 존중과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전문직이 젊은 시절 약간의 노력과 상당한 운으로 얻은 자격증을 가지고 평생 독점이익을 누리는 것뿐이라면, 삶이 너무 부끄럽지 않나.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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