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광장 빚은 神의 손… 묘비명엔 ‘교황도 조아린 예술의 왕’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23. 4. 18.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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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9·끝]
17세기 바로크 예술 빛낸 이탈리아 거장 베르니니 (하)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1598~1680) 홀로 근대 로마의 도시 공간 전체를 일신했다고 하면 물론 과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가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면모를 갖추는 데 이 천재적 예술가가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르니니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데에는 예술에 큰 관심을 둔 바로크 시대 교황들의 결정적 후원이 있었다. 그는 평생 교황 6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일했다. 특히 친한 친구였던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이 1623년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로 즉위하자 그의 지위는 더욱 상승했다. 교황청의 예술 활동을 총괄하는 책무를 맡다가 1629년에는 베드로 성당 건축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때까지 백 년 넘게 지속된 베드로 성당 재건축 사업은 어느 정도 마감되어 몸체는 거의 완성되었고, 비어 있는 내부 공간을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 작품이 발다키노(baldacchino·天蓋)이다. 로마는 베드로 성인의 순교지이며, 그의 무덤은 교황청 안에 있다. 이 무덤의 표시이자 보호 시설로 덮개를 만드는 과제가 그에게 맡겨졌다. 베르니니는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는 거대한 도금 청동 네 기둥을 만들었다. 여기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청동을 조달하기 위해 고대 로마 유적인 판테온 지붕의 청동 들보를 뜯어내 재활용할 정도의 거대한 일이었다.

‘로마를 세계의 수도로’ 재건축 앞장

총 11년에 달하는 오랜 작업 끝에 완성된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구조물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조각품이자 건축의 일부를 이루는 이런 담대한 구상은 이때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이었다. 청동 기둥들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가까이에서 보면 표면에 섬세한 장식이 되어 있다(예컨대 교황의 출신 가문인 바르베리니가의 상징인 벌이 많이 조각되어 있다). 이어서 돔을 떠받치는 거대한 네 기둥을 세웠고, 여기에 각각 거대한 조각상을 붙였는데, 그중 특히 ‘성 롱기누스’는 베르니니 자신의 작품이다.

현재 우리에게 이 작품들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묵중해 보인다. 이는 물론 당대의 필요에 따른 결과다. 종교개혁의 충격에 이어 가톨릭 국가들과 신교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30년전쟁(1618~1648)이라는 대학살극은 유럽 전체의 종교적 수장이자 평화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교황의 권위를 크게 잠식했다. 그런 만큼 이 시기에 모든 예술을 동원해 교황청의 위엄을 되찾고 신자들에게 종교적 위안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한 인물이 바로 베르니니였다.

다음 교황 인노첸시오 10세(1644~1655) 역시 그런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전 교황과 그 가문을 싫어했고, 거기에 봉사하던 예술가 베르니니를 좋아하지 않아서 멀리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당대 최고 예술가이며 최고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신앙의 확산이라는 의미로 이때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전문가인 베르니니를 결국 ‘고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특히 1650년에 희년(禧年)을 맞게 되어 베드로 성당 미화 계획을 더 큰 규모로 수행했다. 엄청난 양의 대리석이 베드로 성당에 속속 도착했다. 베르니니는 이 대리석을 재료로 순교한 교황의 메달리온 56점, 천사상 192점, 비둘기 104점을 1년 안에 제작했다.

다음 새 교황 알렉산더 7세(1655~1667)는 한 걸음 더 나가 체계적이고 대담한 도시계획을 통해 로마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전 시대부터 진행되었던 ‘로마 갱신(renovatio Romae)’ 작업이 재개되었다. 과거 16세기에 식스투스 5세는 주요 순례 성당을 직선 도로로 연결하고 성당 앞에 오벨리스크를 두어서 각지에서 로마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쉽게 길을 찾도록 했다. 이와 유사한 도시 재생 혹은 재건축 작업을 다시 크게 벌였고, 베르니니가 여기에 활발히 참여했다. 특히 포폴로 성문(Porta del Popolo)을 통해 로마로 들어온 사람들을 시내로 인도하는 대로를 재정비해 환희의 갤러리 같은 느낌이 들도록 계획했다.

무엇보다 최대 공헌은 베드로 성당 전면의 광장을 조성한 작업이다. 이때까지 이곳은 단지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진 베드로 성인의 성소(聖所), 영원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베르니니의 아이디어는 거대한 반원형 열주를 세우는 것이다. 열을 맞춘 흰색 열주 네 줄이 둘러서서 타원형 광장을 만들었는데, 위에서 이 광장을 조감하면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치 성당에서 두 팔이 뻗어나가 세상 사람들을 포용하는 모양새다. 이 안에 들어온 순례자들은 베드로 성당 전면의 로지아나 이웃한 바티칸궁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는 교황을 알현하게 된다. 신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 공간에 들어오면 행복감이 고양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모양은 동시에 베드로 성인이 가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한 도시 공간을 이토록 창의적으로 조성한 예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작업은 후일 다른 많은 유럽 도시에도 큰 영감을 주었다.

82세로 떠나기 2주 전까지도 작업

말년에도 베르니니는 베드로 성당 내외를 장식하는 작업을 지속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특색이 없던 앱스(apse·성당 제일 안쪽의 반원 부분), 곧 베드로좌(Cathedra petri·Chair of Saint Peter)를 재정비했다. 여기에 지극히 화려한 금동 왕관을 설치해 이전에 설치한 발다키노와 조응하도록 만들었다. 또 입구를 장식하는 콘스탄티누스 기마상, 알렉산더 7세 교황의 장례 모뉴먼트를 설치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베드로 성당 모습을 거의 완성시켰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 성당과 바티칸궁을 연결하는 스칼라 레지아(scala regia·왕의 계단)를 만들었다. 단순한 계단 같지만 사실은 교묘한 착시 현상을 이용해 매우 인상적인 장엄함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생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 수행한 대규모 프로젝트는 산탄젤로 다리(Ponte Sant’Angelo)를 장식한 천사 상들이다. 강 건너 로마 시내와 교황청을 연결하는 다리이니만큼 상징성이 매우 강할 수밖에 없다. 베르니니는 영원의 도시로 들어가는 순례자들을 인도하고 환영하는 천사상 10점을 구상했다. 천사들은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성물(聖物)들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다만 이 조각 10점 가운데 실제로 그가 완성한 것은 두 점(’I.N.R.I.’라는 글을 들고 있는 천사와 가시관을 들고 있는 천사)이다. 그나마 이 작품을 너무 사랑한 교황 클레멘트 10세가 개인적으로 소장했다가 현재는 로마의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Sant’Andrea delle Fratte) 성당에서 보존하고 있다.

베르니니는 죽기 2주 전까지도 작업을 할 정도로 육체적·정신적으로 기운이 넘쳐났지만, 그 역시 80세가 넘어 이 세상 순례를 마칠 때가 되었다. 1680년 11월 28일 그는 평온한 죽음을 맞았고, 어릴 적 살았던 집 근처의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에 묻혔다. 그곳에서는 이런 묘비명을 볼 수 있다. ‘교황도, 군주도, 수많은 사람도 머리를 조아린 예술의 왕 잔 로렌초 베르니니 여기 살다가 묻히다.’ 우리나라도 위대한 예술가들이 위대한 도시 공간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파리로 간 베르니니]

루이 14세가 홀대하자 “파리 전체 예술가보다 로마 화가 1명이 낫다”

베르니니는 딱 한 번 외국을 방문했다. 1655년 4월 말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강권으로 파리를 방문했다. 당대 최고 예술가를 불러 루브르궁의 보수 확대 작업을 맡기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혁신적 건축안은 루이 14세와 왕실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결국 폐기 처분됐다. 애초에 이탈리아 풍토에 어울리는 베르니니의 디자인은 절대주의 국가의 궁전과는 어울릴 수 없었다. 대신 고전적 스타일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프랑스 건축가 클로드 페로(Claude Perrault)의 안이 채택되었다. 이때 베르니니의 지나치게 오만한 성격이 프랑스 측과 갈등을 일으킨 원인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베르니니는 페로에게 ‘당신은 내 구두를 닦을 자격도 없다’고 했고, ‘카라바초 같은 로마의 화가 한 명이 파리 전체 예술가들보다 낫다’는 말도 했다.

베르니니의 작품이 파리에 들어서지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이탈리아 예술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자신을 초빙한 프랑스 국왕에 대한 예의로 베르니니는 로마로 돌아간 후 장대한 루이 14세 기마상을 만들어 보냈다. 이 작품도 홀대당해 베르사유 정원의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이 기마상은 먼 훗날 빛을 보게 된다.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루브르 박물관의 전면 보수 작업을 할 때 루브르 광장을 장식하는 동상으로 이 기마상이 선택돼 현재 복제 조각이 설치되었다.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연재해주신 주경철 교수님과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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