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때때로 사람들은 봄을 알아채지 못한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봉쇄되고 취소된 시기 봄을 맞은 벅찬 감흥 느껴져
소리 내지 않고 오는 봄… 끈기 있게 지켜보는 사람에게 그 도착이 보인다
봄은 도착한다.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는 것처럼 봄의 도착은 눈에 보인다. 도착 시점은 지역은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내게 올해 봄은 지난 3월 22일 도착했다. 흔들리는 이를 치과에서 뺀 날이었다. 간호사가 약솜을 끼워주며 두 시간 동안 물고 있으라고 했다.
병원에서 나와 목련이 활짝 핀 것을 봤다. 슬며시 꽃잎이 열린 게 아니고 운동회 박처럼 펑 터져 있었다. 벚꽃도 몽우리를 열고 있었다. 맨날 보던 나무들이었고 전날, 아니 치과에 갈 때만 해도 보지 못한 꽃이었다. 잇몸을 마취하고 이를 뽑느라 누워있는 사이 꽃들이 봄맞이 대책 회의를 연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솜뭉치가 입안에서 굴렀다. 멈추지 않은 피에서 찝찔하고 비린 봄의 맛이 났다.
그다음 날 신문에서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봄의 도착(The Arrival of Spring)’을 봤다. 풀밭 위에 시골집이 한 채 있고 나무 두 그루가 앞에 선 장면이다. 하나는 만개한 벚나무이고 다른 나무는 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집 뒤로 늘어선 나무들은 이제 막 연두색을 띠며 비어져 나온 잎들과 제법 짙은 초록의 잎들이 뒤섞여 작은 숲을 이뤘다. 풀밭을 무성하게 채운 잎들은 한낮 태양빛을 받아 제각각 반짝이고 있다.
아이패드로 그린 이 그림은 호크니가 2020년 4월 23일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그린 것으로 ‘No. 241′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그는 2011년과 2013년에도 ‘봄의 도착’이란 이름의 연작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번 시리즈는 프랑스로 거처를 옮긴 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봉쇄된 시기에 그린 것들이어서 그 생동감이 더하다. ‘봄의 도착’ 시리즈 116점이 세계 순회 전시 중인 듯한데 아직 우리나라엔 오지 않았다.
올해 86세인 호크니는 수영장 그림으로 이름난 사람이고 그림 값이 비싸기로 더 유명하지만(그의 대표작 ‘예술가의 초상’은 1000억원이 넘는다) 나는 얼핏 초등학생이 그린 듯한 이 소박한 그림에 갑자기 매료됐다. 바람 한 점 없는 초봄 한낮의 자연 풍경이 사진보다 생생했다.
거무튀튀한 나뭇가지에서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내미는, 노랑도 아니고 연두도 아니고 초록은 더더욱 아닌 그 이파리를 나는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몰랐다. 호크니의 그림은 문자로 불가능한 그 형용을 그림으로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봄의 햇볕과 그늘과 공기가 만들어 내는 어떤 질감이어서, 애초 무슨 색이란 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호크니의 책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가 작년 출간된 것을 알게 됐다.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호크니와 주고받은 이메일과 화상 통화를 정리했다. 이 책에 ‘봄의 도착’ 연작이 여럿 실려 있다. 책의 원제는 ‘봄은 취소할 수 없다(Spring Cannot Be Cancelled)’이다. 모든 것이 취소되던 시기에 작가가 봄을 맞은 벅찬 감흥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며 봄이 눈에 띄게 도착하는 이유를 알았다.
봄은 요란하게 오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다. 끈기 있게 지켜보는 사람에게만 그 떠들썩한 도착이 보인다. 사람들이 벚꽃 놀이를 갈 때쯤이면 봄이 이미 도착해 있는 상태다. 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목격하려면 반드시 혼자 화단을 찾아야 한다. 봄은 우리가 매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매일 얼굴이 조금씩 바뀌어 도착 시점을 가늠하게 해준다.
찾아오는 사람 없고 외출도 자유롭지 않던 코로나의 봄에 호크니는 자연 속에 갇혀 오랫동안 아주 세밀하게 봄을 관찰했다. 그는 봄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주의 깊게 살펴”봤으며 “무엇이 나오고 있는지, 무엇이 가장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는 어떤 것이 나오는지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봤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은 봄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다.
호크니는 말했다. “나는 정물화를 그릴 때마다 아주 흥분되고 내가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천 가지나 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내가 대상에 대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생각할수록 나는 더 많이 알게 됩니다.” 그는 정물화를 그릴 때 흑백 사진을 찍은 뒤 그 사진을 토대로 그렸다. 컬러 사진이 자신의 눈으로 본 색과 질감을 나타내 주지 못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의 그림 속 일렁이는 빛과 물결은 그런 관찰의 결과다.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간 올해는 봄의 도착이 새삼 기쁘다. 틈날 때마다 봄이 머무르고 또 가는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봐야겠다. 호크니처럼 어떤 풍경에서 천 가지나 되는 걸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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