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래 칼럼] 일본 반도체가 부활한다
반도체 등 첨단 분야에서
중국의 개발 역량을
무너뜨리겠다는 것
한국의 중국 공장도 예외 없어
일, 미국과 반도체 동맹 강화
새 공장 짓기 속도전
미국 정부의 대(對)중국 제재는 ‘설리번 테크 독트린’으로 불린다.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해 9월 한 국제 행사의 기조연설에서 반도체 등 컴퓨팅과 바이오, 에너지 분야에서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인 국가 안보 사항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세 분야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이탈리아 경제학자 파레토의 ‘2대8′ 법칙과 함께, 전력 승수(force multiplier)라는 군사 용어까지 언급했다. 세 분야가 전체 산업을 떠받치는 20%의 선도 기술이자, 추가적인 투입으로 군사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이어 그동안은 미국이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한두 세대 앞서가는 정책을 유지해 왔지만, 앞으로는 최대한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기술 개발 역량을 강등시키겠다고 했다. 다시 말해 트럼프 정부에서는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일부 중국 기업을 선별 제재했다면 이제는 첨단 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또 반도체법·인플레이션 감축법 외에도 대통령 행정명령을 통해 중국 내 미국인 엔지니어의 활동과 투자까지 전방위로 봉쇄하겠다고 했다. 대외경제연구원 연원호 경제안보팀장은 “설리번 기술 독트린의 예외 없는 적용이 중국 제재의 대원칙”이라며 “최근 한국을 방문한 반도체법 실무진도 이 점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은 장기적으로 철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미국이 지난 3월 반도체법 세부 조항을 통해 두 회사 중국 공장의 웨이퍼(반도체 원료) 투입량을 10년간 5% 이내로 제한한 것도 사실상 공장 신·증설을 금지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한국 공장에 대한 장비 수출을 예외적으로 허용해 주는 유예 조치가 추가로 연장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공정 전환 등 업그레이드를 허용해 주는 것은 아니며 기존 공장을 유지하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의 또 다른 위기 요인은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쫓겨났던 일본의 재등장이다. 대만 TSMC는 일본 소니와 손잡고 구마모토현의 소니 테크노센터 인근에 일본 최초의 TSMC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이다. 일본 정부가 전체 투자비의 40%(약 4조6000억원)를 지원하고, 통상 5년이 걸리는 공기(工期)를 2년으로 단축하기 위해 하루 24시간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엔 애플의 지원 사격도 한 몫을 한다. 애플의 팀 쿡 CEO는 트위터에 “소니는 세계 최고의 이미지센서를 만드는 애플의 파트너”라고 치켜세웠다.
일본은 또 작년 11월 낸드플래시 기업 키옥시아와 도요타·소니·소프트뱅크 등 일본 대표 기업들이 참여한 라피더스(라틴어로 빠르다는 뜻)를 출범시켰다. 라피더스는 미국 IBM과 손잡고 2027년 2나노(1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공정 기술을 적용한 반도체를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이 삼성전자나 TSMC보다 먼저 2나노 상용화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도 많지만,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포함한 종합 경쟁력에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에 앞서 있어 결코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다.
게다가 일본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비한 미·일 반도체 동맹은 갈수록 힘을 받는 모양새다. IBM과 라피더스의 제휴에 이어 최근 미국 인텔과 일본 소프트뱅크 산하의 세계적인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이 전략적 협력 관계를 구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1980년대 일본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제한하는 반도체 협정과 3년 만에 엔화(円貨) 가치를 2배로 절상한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당시 세계 최고였던 일본 기업들을 반도체 시장에서 퇴출시켰지만, 지금은 반대로 유례없는 엔저(円低)까지 용인하면서 일본을 지원하고 있다. 단기간에 일본이 한국이나 대만을 따라잡기는 힘들겠지만 일본 반도체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겠다는 뜻은 명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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