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상처 입은 자가 속죄한다
죄지은 이·용서한 이 모두 구원
전우원, 속죄로 비로소 자기 삶
상처에 감응하는 인간에 희망
용서는 불가능하다. 온전한 망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가능하다면 그건 애초에 용서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속죄는 완결되지 않는다. 죄의식은 끝이 없고, 이 고통스러운 죄의식을 감내하는 것이 죄인이 가져야 할 최소의 윤리다. 용서를 구하는 이유는 자기 죄를 스스로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죄하면 응답이 있으리라는 기대도 가당찮다. 속죄로 죄의식이 탕감된다면 그건 모순이다.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만 겨우 이루어지는 역설적 사건이다.
이것으로 대속이 되었을까. 그는 대속의 자격이 있을까. 이 질문은 적절치 않다. 전우원은 조부 전두환을 용서해 달라 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우원의 사죄는 전두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우원은 용서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 질문도 틀렸다. 용서는 주고받음의 순환 경제 논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서는 자격이 있는 자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조건부 용서는 용서라고 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때, 용서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이 용서할 때, 자신도 모르게 용서하는 것만이 용서다.
전우원의 속죄는 충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충동성이 속죄의 진정성을 증명한다. 충동은 ‘하지 않을 수 없음’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속죄는 사유와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온몸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행동과 말이 클리셰를 벗어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상처는 매순간 되살아나 그의 행동과 말에 개입한다. 이 상처 입은 청년은 고통 속에 살아온 5·18 유가족 앞에서 철없는 아이처럼 울먹인다. 용서는 비로소 이루어진다.
전우원의 속죄는 영웅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속죄에 성공하고 세상에 인정을 받으면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영웅성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 영웅성을 전복시키는 길은 영웅적 행동 너머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속죄 뒤에 아무것도 없음을 돌발적으로 보여준다. 여느 유튜버처럼 약간의 관종끼와 소통력으로 개인 방송을 하며 뜬금없는 행동을 내보이기도 한다. 이 행동에는 어떤 목적이나 지향성이 없어 보인다. 그는 영웅이 되지 않음으로써 속죄를 완성해갈 것이다.
전우원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정치인이 되려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를 정치인으로 만들어 그의 이미지를 사용해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정치인이 되려고 하는가 묻는 질문에는 전우원의 욕망이 아니라 그 질문에 답을 원하는 자의 욕망이 들어 있다. 지속적으로 그의 이미지는 과잉되거나 왜곡될 것이다. 정치권의 이해관계는 쉽게 명분 논리로 뒤바뀐다. 명분 논리 속에서 영웅화되는 것에도, 희생자처럼 신비화되는 것에도, 이 스물일곱 살 청년은 성공적으로 미끄러질 것이다.
용서와 속죄는 형식주의를 배격한다. 선언의 방식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이미 수십 차례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반성과 사과를 했다며, 이제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정부가 용서의 주체가 돼 버렸다.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가 돼야 한다. 단지 위로와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다. 피해자가 분노하고 호소하는 이유는 진실을 덮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은 진실을 위해서 트라우마의 고통을 반복하고 과거를 현재화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세상이 그 사건을 잊지 말아 주기를 호소한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거듭 반복해서 보고 싶어하지 않고, 가해자 혹은 정부는 이를 악용한다. 국민은 마치 가해자 편에 선 것처럼 구도가 만들어진다. ‘이제 잊을 때도 됐지’라는 가해자의 담론에 포섭되는 것이다. 정부가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를 용서할 때 피해자는 삶 자체를 박탈당한다.
전우원의 속죄가 유의미한 이유다. 유가족은 전우원의 속죄로 이 세계와의 관계망이 재설정되었을 것이다. 허공에서 휘적였던 몸이 비로소 땅에 조금 닿을 수 있게 됐을 것이다. 전우원도 속죄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전우원의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관련 영상 앞에서 주저했었다. 그의 눈물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진짜 눈물은 두렵다.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구경’하는 나 자신의 외설성이 의식되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 쉽게 소비되는 풍경과 그 풍경 바깥에 구경꾼이 된다는 자의식은 불편하다. 지난 11일 ‘김현정의 뉴스쇼’로 비로소 이 사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윤리의식, 김현정 앵커의 윤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희망이 있다. 희망은 상처 입은 자에게 있다. 그리고 그 상처에 감응하는 인간에게 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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