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네가 어떻게 사라지겠어, 내가 너를 잊지 않는데[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절친까지는 아니었던’ 친구의 죽음 이후,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비로소 가늠하는 그의 빈자리
남은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현재진행형’…슬픔과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설 충분한 ‘추모의 시간’ 필요
동화 속 기소영의 ‘친구들’처럼 광주와 세월호의 친구들도…서로의 ‘기억’에서 찾는 건 ‘희망’ 아닐까
동화나 소설의 제목에는 종종 주인공의 이름이 붙는다. 지금 내 방 책장들을 눈 닿는 대로 훑어보아도 그렇다. 그리스인 조르바, 레베카, 위대한 개츠비, 82년생 김지영, 체공녀 강주룡, 산적의 딸 로냐, 아기 사슴 플랙, 꼬마 옥이, 소나기밥 공주……. 문학은 결국 작품 속 인물이 살아가는 이야기니 인물의 성격이 담긴 이름은 작품 전체를 드러내는 제목으로 적당하다.
이름이 담긴 제목에 작품 내용이 좀 더 숨어있는 경우도 있다. <헨쇼 선생님께>(원제 DEAR MR. HENSHAW, 비벌리 클리어리 지음, 선우미정 옮김, 보림, 2005)는 어린이 독자 리 보츠가 동화작가 헨쇼 선생님에게 쓰는 여러 편의 편지글로 구성된 동화다. ‘헨쇼 선생님께’로 시작하는 리 보츠의 편지는 선생님의 답장으로 계속 이어지고, 리 보츠는 자신의 일상을 편지와 비밀일기로 쓰면서 자신을 알고 성장해간다. 추리동화라 할 수 있는 <에밀과 탐정들>(원제 EMIL UND DIE DETEKTIVE, 에리히 케스트너 글, 발터 트리어 그림, 장영은 옮김, 시공주니어, 1995)은 에밀의 돈을 훔쳐간 도둑을 어린이들이 힘을 모아 찾아내는 이야기다. 1929년 출간됐으니 거의 100년이 되어가지만 에밀과 친구들의 모험이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동화 <기소영의 친구들>(정은주 지음, 사계절, 2022) 역시 책 제목에 작품 내용을 비롯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기소영’이라는 흔치 않은 성씨의 이름이 먼저 눈길을 끈다. 이어 제목이 왜 <기소영‘의’ 친구들>인지 궁금해진다. ‘기소영’이란 이름을 제목에 내걸었으면서도 그가 아닌 그의 친구들을 부르는 이유는 뭘까. <에밀과 탐정들>처럼 기소영과 그 친구들이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인 것 아닌가. 책 제목에 이름이 있으면서도 없는 그러니까, 없으면서도 있는 ‘기소영’은 어떤 친구일까.
그건 책을 펼치자마자 알게 된다. 일요일 밤 박채린은 같은 반 친구이자 부회장인 기소영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전해 듣는다. 6학년 3반 학부모 대화방으로 전달된 비보를 알리며 엄마는 학급 회장인 채린에게 내일 아침 국화 꽃다발을 사들고 학교에 가라고 한다. 소영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채린은 곧 “머릿속은 텅 비고, 내가 내뱉은 말이 나랑은 상관없이 공중에 붕 떠다니는 느낌”(10면)을 받는다. 이어 “소영이가 죽었다는 이 상황이 마냥 슬프지가 않고 당황스럽고 낯설 뿐”(11면)이라고 느끼며 그 이유가 ‘절친’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사이였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잠자리에 혼자 누워 “야, 기소영. 우리 절친이니, 아니니?”(11면)라고 마음속으로 묻는 채린이가 문득 가엾어진다. 채린이의 감정은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일 텐데 극심한 슬픔과 고통이 밀려오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의 깊이를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더욱, 어른에게도 힘든 애도의 과정을 채린이가 앞으로 어떻게 겪어나갈지 조용히 두 손 모으는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소영이에게는 친구들이 있었다. 박채린, 남나리, 김영진, 서연화는 각자 기소영과 연결되어 따로 또 같이 어울리는 하나였다. 바로 ‘기소영의 친구들’이다. 이제 소영이는 세상에 없지만 소영이를 애도하며 이들 네 명은 비로소 더욱 단단한 ‘기소영의 친구들’이 된다. 작품 속 인물의 죽음 이후 남은 이들이 죽은 이의 죽음 이전 삶을 발견하는 여느 서사처럼 이들은 각자에게 소영이가 어떤 친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공유하며 알아간다. 무속인 엄마에 대한 소문을 피하려고 이사와 전학을 해야 했던 연화의 비밀을 지키고 연화가 엄마에게 정기적으로 들르는 길을 동행하던 소영이, 마당이 있는 영진이 집에서 유기견이 살 수 있도록 부탁하고 개에게 필요한 비용이나 산책을 책임지던 소영이, 남자 친구 혹은 여자 친구의 사랑을 받던 소영이……. 내가 몰랐던 소영이가 다른 친구의 기억을 통해 살아나고, 다함께 소영이를 기억하는 가운데 이들은 ‘기소영의 친구들’이 된다. 기꺼이 ‘기소영의 친구들’이 되고자 한다.
“탁구공처럼 주고받던 대화가 뚝 끊겼다. 잠깐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웃긴 건 대화 사이에 간간이 끼어드는 침묵도 이제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쯤에서 얘기가 끝났을 것이다. 계속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답답해 나와 나리, 영진이가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면 연화도 조용히 집으로 가버렸을 거다. 그런데 소영이가 떠난 그날 이후로 우리 넷은 조금 달라졌다. 이젠 우리 사이가 느슨해지고 끊어지려 할 때 먼저 나서서 촘촘하게 다시 이어줄 존재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우리는 섣불리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를 연결하려 애썼다. 어찌 보면 이것도 소영이가 떠나면서 우리에게 남겨 준 선물 같은 것이다.”
-<기소영의 친구들> 66~67면
정은주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들의 친구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친구들: 숨어 있는 슬픔>을 보고 이 책의 이야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또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친구들이 쓴 손편지와 거기 담긴 울부짖음을 확인하고는 어른들이 그들에게 추모의 시간을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한다.(<기소영의 친구들>에서 교장 선생님이 장례식 참석을 불허하는 방침을 내리고, 담임 선생님이 소영이의 죽음에 동요하지 말고 일상을 착실히 지키라고 하는 장면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그려진 듯하다.) 작품을 창작하면서는 그저 두 가지 질문만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죽은 소영이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친구들은 소영이를 어떻게 기억하길 바랄까?”
-<기소영의 친구들> 143면
동화 <기소영의 친구들>이 먼저 떠난 친구를 기억하는 이야기를 하듯 최근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이소현 감독)은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의 엄마들이 아이들을 기억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장기자랑>은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엄마들이 같은 제목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희생자 가족을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 가두지 않으며 엄마들이 아이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주었다고 호평받고 있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먼저 마음이 닿은 건 엄마들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아이를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 시제로 말하는 장면이었다. 주인공 없이 9년째 하나씩 늘어난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던 엄마는 딸기 케이크를 두고 ‘(아이가) 딸기를 좋아해’라고 말한다. ‘좋아했다’는 과거형 시제가 아니다. 이어 한 엄마가 자기 아이는 ‘초콜릿을 좋아해’라 하니, 다른 엄마들도 질세라 ‘… 좋아해’, ‘… 좋아해’라고 말을 잇는다. 다른 장면에서도 엄마는 아이를 소개할 때 ‘로봇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라 하지 않고 ‘로봇을 좋아하는 아이예요’라고 말한다. 지난 9년간 엄마들에게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인 채로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엄마가 마음속에 살아있는 아이를 현재형 시제로 부른다고 해서 현실 인식을 거부하는 건 물론 아니다. 2014년 4월16일을 회상할 때, 아이와 보낸 마지막 시간을 기억할 때는 과거형 시제로 돌아간다. 죽었지만 영원히 살아있는 간극에서 기억으로 존재를 계속 이어가는 일 하나가 바로 엄마의 연극이다. 연극이라는 공연 예술에서는 어느 장르보다 더 생생하게 바로 내가 이야기의 인물이 될 수 있다. 엄마는 무대에서 아이의 교복을 입고, 아이를 연기하며, 아이의 삶을 이어나간다. 관객은 수학여행의 장기자랑 시간을 준비하는 무대 위의 아이들을 보며 여전히 현재형인 엄마의 기억을 공유한다.
엄마들이 연극 무대에서 아이들의 삶과 죽음을 이어가듯 <기소영의 친구들>에서 채린이는 소영이의 푸들 브라우니를 자기가 이어 키우겠다고 한다. 자기네 백구에 더해 혼자 돌보기는 힘들다며 영진이가 브라우니를 입양 보내겠다고 하자 엄마에게 허락을 받고 브라우니의 가족이 된다. 그건 소영이의 친구들이 천주교 신자인 소영이 장례미사를 지내고, 졸업앨범과 학급 친구들의 편지를 소영이 가족에게 전달하고, 납골당을 찾은 추모 의식들만큼이나 소영이를 잘 기억하는 일이 될 것 같다. 유기견을 애써 구하고 돌보던 소영이의 뜻이 채린이와 친구들에게서 계속 이어지는 일이니까. 소영이에 이어 브라우니의 가족이 되자 채린이에게는 어른이 되자마자 독립해 브라우니와 함께 살겠다는 꿈도 생겼다.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유가영 지음, 다른, 2023)는 ‘세월호 생존학생, 청년이 되어 쓰는 다짐’이라는 부제처럼 세월호 생존자 유가영씨가 참사 직후부터 지난 9년간 지내온 시간을 담담히 말하는 에세이다. 책을 좋아해 어린 시절부터 도서관 사서를 꿈꾸던 가영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 상담을 받으며 자기 내면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심리학과로 진학한다. 2018년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생존자 친구들과 함께 트라우마에 취약한 어린이를 도왔고, 2022년에는 강원도 산불 피해 노인을 지원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힘들게 거쳐왔지만 자신과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던 힘에 대해 그는 말한다.
“지금의 저에게는 비록 그 괴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딛고 일어날 힘이 있습니다. 만약 이 힘이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제 안의 캄캄한 바다에 갇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을 거예요. 이 힘을 만든 건 제가 여태까지 살기 위해 쳐온 발버둥, 그리고 그걸 알아보고 저를 끌어 올려준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그날 제 손을 잡고 갑판 위로 이끌어준 친구부터, 지금까지 만난 많은 사람 모두의 마음이요.”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146~147면
소영이는 세상에 없지만 우리는 모두 소영이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기소영의 친구들’처럼 광주의 친구들, 세월호의 친구들이 되어 더 이상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는 소영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 해마다 4월이면 다시 읽고, 새로 만나는 책과 영화들이 그 노란 희망을 기억하게 만든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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