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스페인 ‘실버 크라이시스’ 망령
16세기 초 스페인에는 행운이 쏟아졌다. 1519년 소규모 병력으로 아스테카를 침공했던 에르난 코르테스가 결국 1535년 지금의 멕시코 땅을 스페인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잉카제국을 정복해 1535년 페루를 스페인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페루는 오늘날 경계를 기준으로 보면 페루, 볼리비아, 칠레를 비롯해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식민지를 정복한 스페인 제국주의자의 목표는 오로지 황금이었다. 원주민 지도자들이 모아 놓은 보물을 약탈하고 신전을 장식한 금까지 녹여 본국으로 보냈다. 머지않아 원주민이 모아 놓은 귀금속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대한 은광이 발견됐다. 멕시코 해안 도시 아리카 남동쪽 고산지대인 포토시(Potosi)에서 거대한 은 광맥이 발견된 것은 1545년이었다. 1548년에는 멕시코시티에서 북쪽으로 220㎞ 떨어진 시카테카스에서 새로운 은 광맥을 찾아냈다. 이 두 광맥은 17세기까지 스페인을 부유하게 한 원천이 됐다.
기술 발전도 스페인을 도왔다. 수은을 이용해 용이하게 은을 채굴하는 새로운 방법이 이탈리아에서 개발되면서 채광 비용도 낮아졌다. 식민지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은이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스페인은 엄청난 부를 얻게 됐고 항로 안전을 관리하기 위해 선단을 만들었다. 무적함대로 알려진 막강한 해군력으로 선단을 호위했다. 스페인은 하루아침에 강대국 반열에 들어섰다.
16세기 이후 스페인으로 유입된 은의 규모는 세금 목록에 나타난 공식 기록만으로도 16세기에 1만6000t 이상, 17세기 2만6000t 이상, 18세기 3만9000t 이상에 달한다. 공식 자료에 기록되지 않고 밀수를 통해 유입된 규모도 증가했다고 한다. 식민지로부터 유입된 은 때문에 증가한 구매력만큼 생산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에 물가가 치솟아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가속화했고 해외로부터의 수입이 급속히 늘었다. 국내 농업과 산업은 국제 경쟁력을 상실해 침체를 겪었고 생산성은 하락했다. 은 공급 증가로 유동성이 늘어 이자율은 하락하고 부채가 증가했다. 막대한 은의 유입에도 왕실은 군대를 키우고 주변국과 전쟁 비용을 지불하느라 부를 축적하지도 못했다. 스페인으로 유입된 은이 유럽의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가 유럽 전체가 인플레이션을 겪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나 점차 광산 고갈로 은 유입이 감소하면서 유동성 잔치는 끝나게 된다. 스페인 경제는 침체에 빠졌고 파산하는 기업과 개인이 급증했다. 16세기 초 시작된 스페인의 행운은 결국 위기로 마무리됐고, 그 여파로 주변 유럽 국가까지 금융 불안과 경제 침체를 겪었다. 이 사건을 ‘스페인 실버 크라이시스’라고 부른다.
경제 위기는 주로 통화 팽창이 일어난 후 유동성이 축소하는 시기에 발생한다. 통화량 증가로 이자율이 하락하는 시기에는 위험자산 투자가 증가한다. 그러나 통화량이 감소해 이자율이 상승하면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를 먼저 회수하면서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거나 리스크가 큰 분야에서 침체와 파산이 시작된다. 주로 신흥국에서 먼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선진국 자산에 비해 환율 리스크 등 추가 위험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19 발병으로 미국과 세계 경제가 침체 위험에 빠지자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2020년 3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 동안에만 5조5000억달러를 양적완화로 시장에 공급했다. 정책 금리 수준은 0~ 0.25%로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이러한 유동성 완화 정책에 세계 각국이 동참하면서 달러 유입만이 아니라 개별국 통화 공급도 증가했다. 전 세계가 유동성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자산 가격 상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연준은 소위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까지 동원하는 급속한 금리 인상으로 유동성 축소에 나섰다. 대부분 국가가 물가와 환율 안정을 위해 미국의 금리 인상 기조를 따르고 통화 긴축에 나서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최근 리스크 관리에 소홀했던 일부 국제 금융기관들의 파산 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내 금융기관들은 안전해 보이지만 안심하기는 어렵다. 스페인의 실버 크라이시스의 교훈을 누구나 알지만 여전히 위기는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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