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79> 머니볼]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사람들이 맞다, 하면 맞는 것일까. 그들이 틀렸다, 하면 틀린 것일까.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 사람이 최고’라고 하면 대중은 우르르 몰려간다. 그러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돌을 던진다. 전문가는 다시 ‘저 사람이야말로 최고’라고 외친다. 군중은 또 환호한다. 그들이 만약 ‘당신이 최고’라고 손뼉 친다면 마음껏 하늘을 날아도 될까. 세상이 ‘너는 틀렸다’고 할 때 당신은 ‘바로 이건데!’라고 확신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01년 아메리칸 리그 플레이오프, 메이저리그 최약 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모두의 예상대로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에이스 선수들까지 높은 연봉을 준다는 팀으로 떠났다. 이래저래 빌리 빈 단장은 속이 쓰리다. 그러나 성적이 부진한 선수는 퇴출시키고, 실력 있는 선수는 돈을 좇아 철새처럼 떠나는 게 당연하다. 돈이 곧 가치이자 목표인 세상, 이긴 자가 모든 걸 다 갖는 것이 프로 세계의 법칙이다.
빌리는 다른 구단에서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던 피터 브랜드의 재능을 알아보고 부단장으로 영입한다. 피터는 경제학을 전공한 젊은 재원으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버리면 흥미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며 빌리의 생각을 깨운다. ‘승리하려면 득점할 선수를 사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빌리와 피터는 모든 야구 선수의 성적을 통계 내고 그들의 가능성을 수치화한다. 그 결과 출루율이 높은데도 평가절하되어 있던 선수들을 싼값에 영입한다. 훗날 ‘머니볼’이라 불리게 된 운영 방식이다.
“새파란 애송이들이 뭘 알아?” 노장 스카우터들이 빌리를 반대하고 나선다. 성적뿐 아니라 체격과 나이, 외모, 사생활에 대한 소문까지 곁들여 선수 가치를 평가하던 기존의 상식을 역행하기 때문이다. 야구는 ‘통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믿는 선배들의 지혜와 축적된 경험은 소중하다. 하지만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오래된 관행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 빌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지금까지와 다른 결과를 원한다면, 지금까지와 다른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빌리는 실패한 메이저리거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 스타의 자질이 충분하다며 추켜세운 스카우터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스탠퍼드대 전액 장학금을 포기하고 뉴욕 메츠에 입단했다. 그러나 세간의 기대가 너무 무거웠을까. 스카우터의 오판이었을까. 일생일대의 기회라 믿었던 그날의 결정은 그를 깊은 절망으로 이끌었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래서 전문가라 해도 한 사람의 가능성을 재단할 수 없다. 하지만 타인의 칭찬을 바라는 연약한 존재 또한 인간이다. 다른 사람의 판단, 특히 전문가의 인정, 대중의 환호가 곧 자기의 진가인 줄 착각한다. 그 결과 덜 피었을 때, 덜 익었을 때, 심지어 장미가 아닌데 장미인 줄 알고 세상에 나갔다가 상처받고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진 반짝 스타는 의외로 흔하다.
빌리는 선수의 길을 포기했다. 야구를 버린 건 아니었다. 그는 야구를 사랑했고 편견에 갇힌 야구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애슬레틱스 단장이 된 그는 이번에야말로 인생의 홈런을 치고 싶었다.
부상으로 공을 던질 수 없게 된 포수, 투구 자세가 우습다고 소문난 투수, 형보다 못하다고 낙인찍힌 동생, 한때 스타였지만 은퇴 직전의 타자를 데려온다. 기절초풍하는 노장 스카우터들을 겨우 설득했지만 라인업은 자기 권한이라며 이번엔 감독이 협조하지 않는다. 물러설 것인가, 밀고 나갈 것인가? 빌리는 또 한 번 고민에 빠진다.
위험한 도전이었다. 완고하게 밀어붙이다 성과가 없으면 해고될 거라며, 피터조차 그를 걱정한다. 빌리는 이혼한 아내와 그녀의 부자 남편에게 기죽고 싶지 않았다. 딸이 대학 갈 때가 되면 등록금이라며 뭉칫돈을 턱 하니 내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아빠이고도 싶었다. 그러자면 일단 실업자가 되면 안 된다. 모험하지 않고 남들처럼 현실에 안주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인생 목표여도 되는 걸까. 그러면 행복할까.
새로운 도약 위해 오래된 관행 버려야
변화를 일으키고 싶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철저한 조사, 치밀한 계획, 성실한 노력을 담보로 내가 먼저 믿어야 한다. 그래야 남도, 세상도 나를 믿는다. 빌리에게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초라하지만 우린 승리의 팀이다!” 그는 확고한 신뢰를 선수들에게 전한다. 그러자 헛바퀴만 돌리던 엔진의 톱니바퀴가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모두가 놀란 시즌이었다. 첫 승을 따내고 7연승까지 왔을 때, 야구 전문가들은 감독에게 공을 돌렸다. 피터가 어이없어하자 “상관없어, 이기면 돼”라고 빌리는 말한다. 패배가 계속될 때 단장을 교체하라고 떠들어대던 전문가들은 103년의 기록을 깨며 20연승을 달성하자 너나없이 빌리를 칭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우승컵을 쥐지 못하면 100번을 이겨도 물거품일 뿐이다. 애슬레틱스의 최종 결승 진출이 무산되자 그들은 ‘통계 놀음만 하는 빌리의 꿈은 애당초 무리’였다며 비아냥댄다.
“저들은 야구 방식뿐 아니라 야구 자체를 위협당한 거야. 뭣보다 두려운 건 밥줄이 끊기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주도권을 쥔 자들은 광분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앞으로 자네 방식을 배우지 못한 팀은 도태될 걸세.” 빌리의 재능과 비전을 알아본 거대 구단주가 엄청난 연봉을 제시한다. 이제 빌리의 꿈은 이루어진 것일까.
4월 1일, 한국 프로 야구 시즌 개막식이 열렸다.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본선 1라운드에서 탈락한 데다 중계권 비리와 관련,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실이 압수수색까지 당하는 심란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팬들의 야구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개막전이 열린 경기장마다 매진시키며 달려간 팬들은 올해도 변함없이 시즌을 즐기며 선수들을 응원할 것이다.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빌리는 말한다. 언제 홈런이 터질지, 언제 역전의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는 야구는 우리네 삶과 똑같다. 홈런을 치고도 홈런인 줄 모르고 실망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중요한 건, 경기를 계속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다. 빌리는 아빠를 응원하며 불러준 딸의 노래를 들으며 또 다른 변화를 향해 인생의 구장을 달려간다. “어디로 가야 할진 몰라. 하지만 두려움을 떨쳐 버릴래. 그냥 쇼를 즐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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