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스 스터디] 일본 대표 연예 기획사는 어떻게 쇠퇴했나 | 일본 연예계 주무르던 쟈니스, 파벌 싸움에다 시대에 뒤처져 쇠락
3월 29일 일본 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은 10대 초반에 일본 최대 연예 기획사 ‘쟈니스(Johnny’s)’에 소속돼 있었던 남성 A씨가 2019년 사망한 쟈니스의 창업자 고(故) 기타가와(喜多川) 쟈니 사장에게 성폭행당했었다는 사실을 기사화했다. 당시 12세였던 A씨는 다른 소년들과 함께 ‘합숙소’라 불렸던 기타가와의 집에 거주했는데, 이때 기타가와에게 강제로 성폭행당했으며, 당시 합숙소에는 이런 일이 일상화돼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이 같은 폭로는 3월 7일 BBC가 기타가와의 성 착취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포식자: J팝의 스캔들(Predator: The Secret Scandal of J-Pop)’을 공개해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직후 잇따라 터진 일이라 파문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한때 일본 연예계의 신(神)이라 숭배받던 기타가와의 성추행 스캔들은 그렇지 않아도 2010년대 후반부터 쇠락해가고 있던 쟈니스에 커다란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해 저물어가는 ‘쟈니 왕국’
1975년 창업자의 이름을 따 설립된 쟈니스는 몇 년 전까지 일본에서 경쟁자가 없는 1인 독주 체제를 유지했던 막강한 연예 기획사다. ‘쟈니스가 쉬면 일본 방송국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우스개를 단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공중파 채널을 틀면 쟈니스 소속 연예인이 나오지 않는 드라마나 예능, 음악 방송을 찾기 힘들 정도다.
쟈니스는 당시 일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생소했던 체계적인 연예인 훈련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수만이 설립한 SM엔터테인먼트도 초창기에 ‘쟈니스 주니어’라고 불리는 쟈니스의 연습생 제도, 댄스 그룹 단체 활동과 그룹 멤버들의 개인 연예 활동을 병행하도록 장려하는 전략 등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 쟈니스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유명 배우 겸 가수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가 소속된 일본 국민 아이돌 그룹 ‘스맙(SMAP)’, 아라시(嵐) 등을 잇달아 배출하며 이른바 ‘쟈니스 스타일’로 불리는 꽃미남 스타일 남자 아이돌 전문 양성소로 굳건히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쟈니스의 성적표는 처참한 상황이다. 기획사 내부 파벌로 인해 2016년 SMAP이 해산하며 다섯 명의 멤버 중 현재까지 네 명이 회사를 떠났고, SMAP의 뒤를 이은 차세대 국민 아이돌 그룹 아라시 역시 2020년부터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소속사를 대표하는 굵직굵직한 중견 연예인들과 유망주들의 탈퇴 도미노가 줄을 이었고, 마침내 작년 11월 기타가와가 생전에 후계자로 지목해 쟈니스 부사장이자 자회사 사장직을 맡았던 배우 출신 경영인 타키자와 히데아키(瀧澤秀明)까지 쟈니스를 탈퇴한 뒤 최근 자신의 연예 기획사를 차렸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제왕 갉아먹은 내부 파벌
일본 주간지들이 분석하는 쟈니스 쇠락의 여러 요인 중 하나는 경영권 난투와 조직 내 파벌 싸움이다. 기타가와가 고령 등을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2010년대 중후반부터 쟈니스 내부에선 기타가와의 누나인 메리와 그의 딸 쥬리를 중심으로 한 ‘쥬리 라인’, SMAP을 키워낸 이이지마 미치(飯島三智) 매니저 파벌인 ‘이이지마 라인’으로 소속사 내부가 갈렸다. 원래 쟈니스 사무직으로 입사한 이이지마는 처음엔 인기를 얻지 못한 SMAP을 국민 아이돌로 키워내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고, 덕분에 회사에서 신임도 컸다. 하지만 사내에서 이이지마의 입김이 커지면서 이를 견제하려는 쥬리 라인의 압력이 세지자, 이이지마는 자신이 키운 SMAP을 데리고 회사를 떠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에 남겠다는 멤버와 이이지마를 따라나서겠다는 멤버 사이의 의견 충돌이 생겼고, 일본 총리조차 관심을 가질 정도로 화제가 됐던 SMAP 해산 논의는 결국 해산으로 귀결됐다.
이이지마가 쟈니스를 떠나고 2021년 메리가 사망한 이후에도 내부 파벌은 계속됐다. 이번엔 기타가와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타키자와파’와 쥬리 사장파로 파벌이 갈렸다. 일본 연예 매체 사이조 등에 따르면, 타키자와가 쟈니스를 떠난 이유 역시 쥬리와의 마찰 때문이다. 최근 주간문춘은 타키자와 및 그가 키웠던 유망주 ‘킹 앤 프린스’가 쟈니스를 퇴소한 원인으로 쥬리의 냉혹한 파벌 정치를 지목했다가 쟈니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바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쟈니스 시스템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점도 쟈니스 몰락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꽃미남 남성들로만 구성된 쟈니스에선 기무라 타쿠야 등 몇몇 예외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결혼을 금지하고 있다. 소속사 연예인들이 개인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사용하거나 유튜브 채널을 여는 것도 2017년까지 철저하게 금지했었다. BTS가 유튜브로 자신들의 일상을 전하면서 전 세계 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해외 진출을 노리기보다 내수 시장에만 집착한 것도 쟈니스가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문화 연구 전문가인 캐나다 사이먼프레이저대학 진달용 언론학 교수는 J팝이 쇠퇴한 가장 큰 이유로 ‘폐쇄성’을 꼽았다. 일본 음악업계는 지식재산권 보호에 집착해 유튜브와 스트리밍 등 신기술 도입을 극도로 꺼렸다. 일본 음악업계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음반 판매인데, 유튜브로 음원을 공개하면 음반사 수익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 쟈니스였다.
경쟁자 부재로 위기감 없어
2000년대 중후반까지 쟈니스는 경쟁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일본 연예계를 이끈 절대 강자였다. 하지만 라이벌의 부재(不在)는 오히려 쟈니스에 독으로 작용했다. 독보적인 위상을 누렸기에 위기감을 느끼거나 자정(自淨)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연예계 환경 역시 쟈니스가 오만의 늪에 빠지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쟈니스는 방송국 위에 군림했고, 방송 PD 등 제작자들은 ‘쟈니스에 찍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쟈니스를 퇴소한 연예인은 기용하지 않는 일이 암암리에 발생했다. 2019년 NHK 등은 ‘2017년 회사를 나간 전(前) SMAP 멤버 3인을 방송에 출연시키지 말라고 방송사에 압력을 가했다는 혐의로 일본 공정거래위원회가 쟈니스를 조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쟈니스의 행위가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며 주의를 요구했는데, 이는 기타가와의 사망으로 쟈니스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데다 문제가 된 전 SMAP 멤버 3인이 워낙 거물급이어서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 이전부터 이런 식의 관례가 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사실 기타가와의 성추행 의혹 역시 BBC가 보도하기 전에도 연예계에선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1999년 주간문춘이 기타가와의 성 학대 의혹을 보도하자 쟈니스가 주간문춘을 고소하면서 4년여간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도쿄고등법원은 주간문춘 기사에 실린 주장 중 미성년자 성 학대 주장을 포함한 총 9건이 진실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언론에선 이를 다루지 않았고, 형사 재판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기타가와는 2019년 사망할 때까지 기소되지 않은 채 사장직을 유지했다.
일본 ‘잡지 프레지던트’는 “쟈니스의 몰락을 보면 한때 ‘(연예계) 왕국’이라 불렸던 (연예 기획사) 와타나베(渡邊) 프로덕션을 연상케 한다”고 꼬집었다. 논픽션 작가 군지 사다노리(軍司貞則)가 쓴 ‘나베 프로(와타나베 프로덕션의 줄임말) 제국의 흥망’에 따르면, 나베 프로는 회사를 떠난 연예인을 기용하지 못하게 방송사에 압력을 넣거나 “우리 애를 쓰고 싶으면 촬영 날짜를 바꾸라”는 등 고압적 자세를 취한 일이 많았다. 프레지던트는 “결국 나베 프로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방송사의 반란으로 왕국은 무너졌다”면서 “쟈니스는 과연 살아 남을 것인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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