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LCC 유일 제주항공 시뮬레이션 센터 | 비행기 앞 눈, 비, 안개, 새 떼 리스크 훈련으로 대비해요
“버드 액티비티(조류 활동)가 있는 것 같습니다.” 3월 29일 오전 8시, 서울 강서구 하늘길 화물청사에 있는 제주항공 훈련센터. 조종석 앞 화면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졌고, 제주항공의 B737-8은 김포공항에서 이륙해 제주공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순간 기체가 크게 흔들리며 경고음이 들렸다. 새 떼가 날아오다가 비행기와 부딪히는 조류 충돌(버드 스트라이크)이 발생한 것.
새가 왼쪽 엔진으로 빨려 들어가며 두 엔진 중 하나가 고장이 났다. 이상 상황이 악화되면 비행기는 추락한다. 오정환 제주항공 기장, 박찬국 제주항공 부기장은 침착하게 왼쪽 엔진을 껐다. 멀쩡한 오른쪽 엔진의 추력은 89.3%지만, 왼쪽 엔진은 14.6%까지 낮아졌다. 오 기장과 박 부기장은 오른쪽 엔진을 이용해 무사히 김포공항으로 회항했다.
폭우, 조류 충돌 생생하게 재현
B737-8은 엔진의 힘이 세고 연비가 좋아 기존 항공기 대비 운용비를 7% 줄이면서 1000㎞를 더 날 수 있다. 조종석 앞 120도 화면은 눈, 비, 안개 등 모든 기상 상황을 가상 화면으로 보여준다. 전 세계 모든 공항 활주로가 눈앞에 펼쳐지며 생생한 교육이 가능하다. 제주항공이 지난해 4월 도입한 시뮬레이터는 이 항공기 조종석 내부를 90% 가까이 재현했다. 2019년 첫 번째로 도입한 시뮬레이터에 이어 두 번째다. 국내 LCC 중 시뮬레이터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제주항공이 유일하다. 타사는 시뮬레이터를 대여하거나 외국에 나가서 훈련받아야 하지만, 제주항공은 자체 장비로 교육할 수 있다.
제주항공은 안전에서만큼은 보수적이다. 항공사는 조종사들을 더 많은 노선에 투입해 수익을 내야 이득이다. 그러나 제주항공은 무리한 항공편 확대 대신 안전에 투자했다. 신규 도입한 시뮬레이터 가격은 약 180억원이다. 조종사들은 법적으로 일 년에 네 번 시뮬레이터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일종의 중간고사, 기말고사인 셈이다. 이날 시뮬레이터 훈련 시범을 보인 오 기장과 박 부기장 역시 “사실 훈련센터에 오는 것이 썩 반갑지만은 않다”며 웃었다. 제주항공에 소속된 300명의 기장과 300명의 부기장은 일 년에 필수로 다섯 번씩 시뮬레이터 훈련을 받아야 한다. 운항승무원이 되기 위한 훈련생 50여 명도 시뮬레이터 훈련을 받는다.
뿌연 안개, 높은 산도 대비
비행기는 해가 쨍쨍한 푸른 하늘만 날지 않는다. 지난 1월 제주도에 강풍이 불고 폭설이 내려 항공편이 결항했던 때와 같이 극한의 기상 상황이 아니면 비행기는 뜬다. 조종사들은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다양한 기후 현상에 대비한다. 훈련이 끝나면 회의실(디브리핑룸)에서 녹화된 훈련 영상을 보며 교육을 진행한 교관의 피드백을 받는다. 제주항공의 비행 시뮬레이터 훈련을 책임지는 장익세 제주항공 SIM(시뮬레이터)훈련팀장은 “영상에는 훈련 때 기록된 각종 수치 등도 함께 나와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일교차가 큰 봄에는 활주로에 안개가 짙게 낀다. 이때 시정도(물체의 존재나 형상을 인식하는 눈의 능력)에 따라 운항 당일 기체를 몰 수 있는 조종사가 달라진다. 즉, 안개가 심하게 낀 날 조종석에 앉기 위해서는 시뮬레이터 훈련 등을 통해 시험을 보고 추가 자격증을 획득해야 한다. 장 팀장은 “날씨에 따라 조종사들의 계획을 조율한다. 시정도가 낮은 상황에서 받는 훈련을 저시정 훈련이라고 하는데, 통과하면 더 높은 등급의 자격증을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날 시뮬레이터에서는 화면상 시정도를 200m로 설정했다. 통상 미세먼지가 없고 날씨가 좋은 날은 시정도가 10㎞ 이상이다. 시정도 200m는 고속도로에서 앞차와 간격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심하게 낀 날이다. 화면에서는 항공기가 활주로 가운데 위치했는지 파악이 어려울 정도로 눈앞이 뿌옜다. 이 경우 항공기는 착륙 직전이 돼서야 활주로가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조종사들은 창밖으로 활주로를 보며 착륙하지만, 안개가 심하면 자동 착륙 장치에 의존해야 한다. 조종사들은 착륙하면서 생길 기체 결함 등 상황에 대비하는 훈련을 받는다.
또한, 전 세계 모든 공항별로 비행 시 악조건에 대비하는 훈련이 가능하다. 예컨대 김해공항 북쪽에는 돗대산(해발 320m)이 있다. 2002년에는 중국 민항기가 이곳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해 129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따라 조종사들은 김해공항에서 이륙 시 산과 가까워졌을 때 회피하는 기동 훈련을 받는다. 장 팀장은 “김해공항은 산,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은 새, 제주공항은 바람이 주요 위험 요소다.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 스콜에 대비해 훈련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안전은 ‘소통’에서 온다”
기장, 부기장 간의 소통 역시 안전의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위계질서가 명확한 조종사 사회의 특성상 부기장이 기장에게 의사를 표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최근 항공 업계에서는 CRM(Crew Resource Management·승무원 자원 관리)을 강화하는 것이 추세다. 장 팀장은 “훈련을 통해 조종 능력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조종사들 간의 협동과 소통 능력을 키우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장 팀장은 1970년대 발생한 항공사고 원인의 반 이상은 인적 요소라고 말했다. 즉, 호흡을 맞춰야 하는 기장과 부기장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장 팀장은 “조종사가 몇백 명이다 보니 마음이 맞는 기장과 부기장만 합을 이뤄 비행할 수는 없다. 훈련 때도 임의로 짝을 짓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과 시험을 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부기장이 먼저 버드 스트라이크 상황을 인지해도 기장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사고가 발생한다. 훈련 시 기장과 부기장의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 교관은 디브리핑룸에서 “기장은 부기장을 동료로 대우해야 한다”나 “부기장도 기장이 어려워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할 수 있다. 장 팀장은 “우리나라는 조종사 간의 파워 디스턴스(power distance·권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간의 거리)가 유독 심한 편이지만 이를 깨기 위해 녹화한 시뮬레이터 훈련 영상을 복기하며 소통 방식에 대해서도 피드백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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