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19>] 크레디트스위스와 템플기사단
스위스의 세계적인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도산 위기에 내몰리면서 3월 19일(현지시각) 스위스의 동료 은행인 UBS에 헐값에 매각됐다. 사실 CS의 붕괴는 오래전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CS는 과거 10여 년 동안 여러 스캔들에 연루됐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은 2022년 2월 내부 직원이 비밀 고객 명단을 언론사에 유출한 사건 때문이었다. 스위스 은행업의 상징인 비밀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한 무한대의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호사가들은 이러한 스위스 금융의 비밀주의 전통을 중세 십자군 전쟁에서 활약했던 템플기사단(Ordre des Templiers)과 연결하기도 한다. 1315년 스위스를 침공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기사들이 모르가르텐 계곡에서 스위스 농부들에게 괴멸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호사가들은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 군대와 스위스 농민군 사이의 전투력 격차가 매우 컸다는 점, 템플기사단이 해체된 1307년과 이 전투가 벌어진 1315년 사이에 시간적 근접성이 있는 점, 그리고 스위스 은행의 군대식 규율과 비밀주의가 템플기사단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스위스 은행가들은 템플기사단의 후예인 것이다.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은 서양 중세 시대에 가톨릭교회의 지원 아래 이뤄진 일련의 종교 전쟁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십자군 중에서도 성지(Holy Land) 십자군이 제일 유명하고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성지 십자군이란 1095년에서 1291년 사이 서유럽인이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빼앗기 위해 벌인 아홉 차례의 동방 원정을 의미한다. 십자군 전쟁은 이외에도 무어인을 내쫓기 위해 이베리아반도에서 벌어졌고, 동방정교회 교도를 개종시키기 위해 서부 슬라브 지역에서도 일어났으며, 발트해 및 핀란드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북부 유럽에서도 치러졌다.
십자군 운동은 종교적 열정에 의해 시작됐지만, 상업적 욕망에 이용되기도 했다. 1203년 제4차 십자군은 금전적 이유 때문에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애초 십자군 사령부는 베네치아 상인들과 3만 명을 수송하기 위한 용선 계약(선박 이용 계약)을 체결했지만, 각지의 십자군이 비용이 저렴한 다른 항구의 선박을 이용하는 바람에 정작 베네치아에서 출발한 인원은 계약 인원의 절반에 불과했다. 막대한 경제적 손실에 직면한 베네치아 상인들과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 십자군 사령부는 군대를 돌려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당시 십자군은 식량도, 보급품도 없었기 때문에 부유한 기독교 국가를 약탈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고 한다.
십자군은 유력한 영주들이 주도하기도 했지만, 일반 농민이 일으키기도 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처럼 십자군은 전문적 군사 집단으로만 조직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 찼던 것도 아니다. 1212년 프랑스에서는 어린이 3만 명으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이 조직됐다. 어른들은 모두 죄지은 불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순결한 어린아이들만이 신의 가호를 받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 십자군이 배에 타자마자 마르세유 상인들은 이들을 이집트로 데려가 노예로 팔아버렸다.
템플기사단과 은행의 탄생
아홉 번에 걸친 성지 십자군 전쟁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절반의 성공이라는 수식어도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단 한 번 예루살렘을 되찾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한 기사 중 신앙심이 깊은 8명의 프랑스 기사들이 1118년 예루살렘의 솔로몬 신전을 본거지로 템플기사단을 설립했다. 이들은 기사도 정신과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이상적 인간상을 추구했으며, 예루살렘 각지에서 군사적 임무를 수행했다. 템플기사단은 1128년 교황의 승인을 받아 기사와 사제라는 성·속의 신분을 겸하게 됐고, 이러한 이중적 신분이 이들에게 새로운 경제적 역할을 부여했다. 이들의 이중적 신분이 일종의 규제 공백으로 작용한 것이다. 템플기사단은 서유럽의 군주, 제후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고 수천 곳에 이르는 영지를 기부받았다. 참회자이자 약탈자였던 템플기사단은 예루살렘 침공 과정에서 엄청난 재물을 수중에 넣었고, 이를 기반으로 동서의 무역 활동에 참여했으며, 자연스럽게 금융업을 수행했다.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에 예루살렘을 빼앗긴 이후 템플기사단은 금융가로서의 역할에 주력했다. 이들은 영국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수천 개의 성채를 근거지로 은행업과 숙박업을 영위했다. 오늘날의 JP모건과 힐튼호텔이 결합한 형태였다. 템플기사단은 원래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이들에게 숙소와 자금을 대출하는 일을 했으나 점차 그 역할이 바뀌어 각국 왕실, 영주,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을 도맡게 됐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이자부 대출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출금에 대한 이자는 종교적 기부의 형태로 돌려받았다. 템플기사단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슬람 금융(Islamic finance), 즉 돈을 빌려주되 이자는 받지 않고 다른 물건으로 돌려받는 대출 형태를 이용한 것이다.
200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 기간 내내 템플기사단은 수많은 순례자, 기사, 영주, 국왕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유럽 최대의 금융기관이 됐다. 이들은 오늘날 일론 머스크가 창립한 엑스닷컴(X.com·현 페이팔)처럼 지중해 세계의 송금 업무를 취급했다. 당시에는 인터넷은 물론 전화나 전신이 없었기 때문에 송금 업무는 양피지(양가죽을 얇게 늘린 것)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영국의 영주는 런던의 템플 교회에 현금을 맡기고 예루살렘의 템플 교회에 가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이들은 현금 대신 양피지(어음)를 들고 다녔다. 당시에는 귀금속(금·은)이 화폐였기 때문에 런던에서 예루살렘까지 막대한 현금을 수송하는 일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템플기사단은 런던에서 예루살렘까지 수천 개의 성채와 자체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국제 송금 업무에 특화할 수 있었다.
‘13일의 금요일’의 유래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영화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291년 이슬람의 수장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템플기사단은 키프로스 섬으로 후퇴했으며, 이때부터 이들은 전사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됐다. 1307년 재정적 파탄에 직면한 프랑스의 미남 왕 필립 4세는 템플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이들을 긴급 체포했다. 그러나 템플기사단은 교황청 산하의 수도원이었기 때문에 국왕이 이들을 처벌할 권한이 없었다. 당시는 세속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돼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교황 클레멘스 5세가 필립 4세의 군사적 압력에 굴복함에 따라 템플기사단은 수도원의 자격을 박탈당했고, 체포된 템플기사들은 화형에 처해졌으며, 기사단 조직은 와해됐다. 할리우드 공포 영화 ‘13일의 금요일’의 토대가 된 서양의 미신, 즉 13일과 금요일이 겹치면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는 미신은 필립 4세가 템플기사단을 공격한 날이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이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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