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 파지 저항성 대장균 균주] 생물 공장 망치는 바이러스, 설계도 바꿔 막는다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전문기자 2023. 4. 1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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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전문기자현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전 한국과학기자협회 회장

인간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쟁을 하는 사이, 대장균도 공장에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였다. 대장균 유전자를 바꾸면 인슐린 같은 바이오 의약품이나 바이오 디젤 같은 청정 연료를 발효 공정으로 생산할 수 있지만, 바이러스 감염은 대장균을 죽이거나 생합성 능력을 떨어뜨려 생물 공장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과학자들이 대장균의 단백질 합성 경로를 바꿔 원하는 물질은 그대로 생산하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못하게 원천 차단하는 길을 열었다. 생물 공장의 대장균이 밖으로 유출돼도 공장이 아닌 자연조건에서는 살 수 없어 생태계 교란 가능성도 막았다.

단백질 합성 과정 사진 미 국립보건원

생물 공장 설계도 바꿔 바이러스 차단

미국 하버드대 의대의 조지 처치(George Church) 교수 연구진은 3월 15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대장균의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와 운반리보핵산(tRNA)을 바꿔 바이러스 저항성을 가지는 균주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대장균 같은 박테리아에 감염되는 바이러스는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다. 1917년 프랑스 미생물학자 펠릭스 데렐이 그리스어로 ‘박테리아를 먹는다’는 뜻에서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줄여서 ‘파지(phage)’라고 한다. 최근 대장균에 유용 유전자를 넣어 바이오 의약품이나 화학산업의 원료, 청정 연료를 생합성하는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이 크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파지 바이러스가 발목을 잡고 있다.

하버드대 연구진은 대장균의 단백질 합성 경로를 수정해 바이러스가 침입해도 자신을 복제하지 못하도록 했다. 바이러스는 대장균 유전자에 자신의 유전정보를 끼워 넣고 복제한다. 이를테면 남의 공장 기계에 원료를 집어넣고 제품을 공짜로 생산하는 방식이다. 하버드대 연구진은 공장 설계도를 바꿔 이런 도둑 생산을 차단했다.

유전물질인 DNA는 아데닌(A)·구아닌(G)·시토신(C)·티민(T) 등 네 가지 염기로 구성된다. 이 염기들이 배열된 순서에 따라 아미노산들이 연결돼 모든 생명현상을 관장하는 단백질을 만든다. DNA의 염기들은 세 개씩 짝을 지어 각각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바로 코돈(codon)이다. 단백질을 만드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인데, 염기 3개의 짝은 기능이 겹치는 것들이 많아 코돈은 모두 64개다. tRNA는 코돈의 유전정보에 따라 아미노산을 가져와 연결한다(‘단백질 합성 과정’ 그래픽 참조).

연구진은 대장균에서 세린이라는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코돈 두 개를 삭제했다. 하버드대 연구진은 tRNA까지 변형해 세린 코돈을 보면 류신이라는 다른 아미노산을 가져오도록 했다. 이제 바이러스가 침입해 자신의 유전정보를 대장균에 끼워 넣어도 세린 대신 류신 아미노산이 연결돼 제대로 복제할 수 없다. 설계도가 바뀌어 남의 공장 기계에 몰래 원료를 넣어도 제품이 엉망이 되는 것이다.

카이스트 이상엽 교수 연구진은 대장균에 방어 유전자를 넣어 파지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 KAIST

10년 동안 바이러스 막는 연구 발전

처치 교수는 2013년 ‘사이언스’에 처음으로 코돈을 바꿔 파지 바이러스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제이슨 친 교수는 2019년 대장균의 코돈 64개를 61개로 줄인 균주를 만들었다. 바이러스가 침입해도 코돈이 3개가 없어 제대로 복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지난해에는 세린 tRNA를 없애지 않고 세린 대신 프롤린과 알라닌을 가져오도록 바꿔 바이러스의 단백질 합성이 더 엉망이 되도록 했다.

하버드대 연구진의 연구는 지난해 케임브리지대의 연구를 발전시킨 것이다. 실험 결과 하버드대 의대 캠퍼스 주변이나 하수구, 닭장, 쥐 서식지 등에서 채집한 바이러스가 케임브리지대가 만든 대장균 균주는 감염시키지만, 이번에 만든 하버드대의 균주는 건드리지 못했다.

하버드대 연구진은 유전자 변형 대장균이 자연으로 유출돼 생태계를 교란할 가능성도 차단했다. 연구진은 생물 공장의 대장균이 자연에 없는 인공 아미노산이 있어야 단백질을 합성하도록 만들었다. 대장균은 생물 공장에서 인공 아미노산으로 인슐린을 합성할 수 있지만, 자연으로 유출되면 해당 인공 아미노산이 공급되지 않아 단백질을 합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대장균에 결합한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녹색)의 전자현미경 사진. 파지 바이러스는 대장균 안에서 증식한 다음 밖으로 나오면서 대장균을 죽인다. 사진 Eye of Science

바이러스 저항 유전자, 자살 단백질도 찾아

이상엽 카이스트(KAIST) 생명화학공학과 특훈교수는 “하버드대 연구진은 단백질 합성 경로를 바꿔 파지가 침입해도 복제를 못 하게 하는 한편, 대장균이 밖으로 유출돼도 자연에서 살지 못하게 해 바이러스 감염과 생태계 교란을 둘 다 원천 차단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파지 바이러스가 이런 방어막을 뚫을 정도로 빠르게 대규모 변이를 일으키기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며 “파지 저항 균주를 만든 다양한 방법을 동시에 쓰면 더 강력한 방어막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지 저항성 대장균은 다른 방법으로도 개발됐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마이클 롭 교수 연구진은 지난해 ‘네이처’에 파지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대장균이 스스로 죽는 프로그램을 작동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도 사멸된다. 연구진은 대장균의 동반 자살 원리를 이용하면 바이러스가 침입해도 대장균 중 일부만 희생하고 전체는 살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파지 저항성 대장균 균주가 개발됐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 연구진은 지난해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파지 방어 유전자를 가진 대장균 균주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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