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노동정책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때
[제정임 칼럼]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주인공 리키는 택배노동자로 숨 가쁘게 살아간다. 스마트 단말기를 통해 배달 동선을 분 단위로 감시당하며, 소변을 빈 음료통에 해결해야 할 정도로 시간에 쫓긴다. 하지만 법적으론 자기 차로 배달을 대행하는 개인사업자여서, 노동자로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정해진 업무량을 못 채우면 가차 없이 벌금이 부과되기에 말썽을 부린 아들의 학부모 상담에도 가지 못한다. 아들은 어쩌면 피할 수 있었을 정학 처분을 받는다. 어느 날 리키는 배달 물품을 노린 불량배들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된다. 그런데 망가진 스마트 단말기 대금과 결근 벌금 등을 내야 한다는 얘길 듣곤 치료를 포기하고 퇴원한다. 다음날 새벽 가족은 멍투성이로 일하러 나가는 그를 말리며 절규하지만, 흐릿해지는 눈을 부릅뜨며 그는 차의 속도를 높인다.
이 영화는 선진국 가운데 매우 불평등한 나라의 하나로 꼽히는 영국에서 노동계층이 처한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내 얘기’처럼 공감할 한국인이 화물·택배노동자 등 특수고용직만은 아닐 것이다. 리키는 간병인으로 일하는 아내와 함께 어떻게든 내 집을 마련하려 애쓰지만, 임대주택을 벗어나긴커녕 빚만 더 진다. 시간 부족 탓에 아이들도 세심히 보살피지 못한다. 비정규직 부모 등 한국 노동자 가정에도 흔한 사연이다. 주거비, 보육비, 사교육비 압박과 교육을 둘러싼 경쟁이 유난한 한국에서 맞벌이 서민 부모의 고통은 더 클 수 있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78로 세계 최저를 기록한 데는 이런 현실이 투영돼 있을 것이다.
많은 노동자가 시간적·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이고 그것이 세계 최저 출산율의 한 원인이 된다면, 정부가 할 일은 분명하다. 성실하게 일하는 이들이 생계를 꾸리고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이 방향과 거꾸로 가고 있다. 주당 근무시간을 현재 최장 52시간에서 일시적으로 69시간, 혹은 (대통령 보완 지시에 따라) 60시간까지 늘릴 수 있게 하는 노동시간 개편안은 아이 키우는 가정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 수 있다. 부모가 모두 집중 근무를 한다면, 밤늦게까지 아이를 맡아줄 보육시설이 있기나 한가? 직장생활을 육아와 병행하기 어렵다면, 요즘 젊은이들의 선택은 그냥 아이를 낳지 않는 쪽일 것이다.
한국은 산업재해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이다. 노동시간 개편은 안 그래도 ‘산재 공화국’인 현실을 더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 사망사고는 건설 현장에 특히 많은데, 과로에 따른 주의력 저하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일에 시달리다 죽는 연간 수백건의 ‘과로사’도 노동시간이 개편되면 더 늘어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 전문가들은 ‘불규칙한 근무시간’이 불안장애 등을 키울 수 있으며, 집중 근무에 따른 과로로 일단 몸에 이상이 생기면 나중에 몰아서 쉰다고 해도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한다. 오이시디 평균(연 1700여시간)보다 200여시간이나 많은 노동시간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주당 최장 근무시간과 불규칙 노동을 늘리는 것은 산재를 더 늘릴 우려가 있는 역주행이라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이 역주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기술혁신이 일자리 지형을 바꾸는 시대라서다. 챗지피티(chatGPT) 열풍에서 보듯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고, 로봇 등 자동화 기계는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체하는 흐름이 가속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은 앞으로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도 일자리 총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보고, 주 4일 혹은 주 3일 근무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기술로 생산성을 높이면서 노동시간은 줄이고 일자리를 나눠 실업 충격을 최소화하자는 취지다. 경제학자인 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한국방송>(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노동의 질, 즉 생산성과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지 고민해야 할 21세기에 노동시간(양)을 어젠다(과제)로 삼는 것은 1980년대로 돌아가자는 얘기”라고 꼬집었다.
기후위기 대응, 지역불균형 개선, 불평등 완화, 생산성 혁신 등 시대적 과제가 긴박하지 않은가. 지금이 노동시간 개편, 노조 회계 공개 등을 ‘노동개혁’이란 이름으로 정부가 ‘최우선’ 추진할 때인지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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