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환자로 꽉찬 응급실···무너진 심뇌혈관 치료시스템
정작 중증환자는 제때 치료 못받아
수도권마저 6명 중 1명은 '뺑뺑이'
전문진료과 배제도 이송지연 요인
"권역별 심뇌혈관센터 확충해야" 상>
평소 심방세동을 앓아온 김모 씨(58·여)는 갑작스런 소뇌경색으로 평택성모병원에서 정맥혈전용해술(IVT)을 받은 지 이틀만에 뇌부종이 발생했다. 뇌부종 치료를 위해 119 구급차를 타고 분당서울대병원을 찾았으나 응급실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 당했다. 구급차에 실려 순천향대서울병원으로 이송하던 김씨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병세가 악화됐다. 긴급 수술이 필요했지만 순천향대서울병원에는 수술 후 치료를 담당할 중환자실 병상이 없었다. 순천향대서울병원 신경과 전문의가 분당서울대병원 신경과에 연락해 수술 가능 여부를 확인한 뒤에야 전원이 결정됐다. 설상가상 119 이용이 불가능한 상태라 1시간 가량 기다린 끝에 도착한 사설 앰뷸런스를 타고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김씨가 치료 가능한 응급실을 찾아 전전하다 다시 분당서울대병원에 옮겨진 건 6시간 만이었다. 뒤늦게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김씨는 아직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씨의 사례는 응급실을 찾지 못해 사망한 대구 10대 청소년 응급 환자를 연상케 한다. 추락 사고로 발목과 머리에 부상을 입은 여학생은 경찰에 발견돼 119 구급대로 인계될 때까지 의식이 있었지만 8개 응급의료기관에서 퇴짜를 맞고 140여 분 만에 대구가톨릭대병원에 도착했을 땐 심정지 상태였다. 중증 응급 환자가 119 구급차를 타고도 응급실을 찾아 떠돌다 치료 골든타임을 놓치는 소위 ‘응급실 뺑뺑이’는 오랜 기간 곪아온 문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중증 응급환자 145만 명 중 절반에 가까운 약 71만 명(49.1%)이 적정 시간 내에 응급실에 도착하지 못했다. 적정 시간 내 응급실에 도착하지 못하는 중증 응급 환자 비율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전체 중증 응급환자 중 적정 시간 내 응급실에 도착하지 못한 환자 비율은 2018년 47.2%에서 2022년에는 52.1%로 약 5%포인트 증가했다. 중증 외상 뿐 아니라 심근경색, 뇌출혈, 뇌경색 등 응급 심뇌혈관질환도 적정 시간 내 응급실 미도착 비율이 일제히 늘었다.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차지하는 초고령화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심뇌혈관질환은 노인인구가 증가할수록 환자가 늘어난다. 지난해 한국인 사망원인 4위를 차지한 뇌졸중은 2030년에 발생률이 연간 35만 건에 이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뇌졸중은 골든타임이 중요한 대표 질환이다. 김태정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증상 발생 4.5시간 이내 정맥 내 혈전용해제 투여, 큰 뇌혈관이 막혀 있을 땐 동맥 내 혈전제거술을 시행해야만 후유장애를 최소화할 수 있다”며 “응급실에 뇌졸중 의심 환자가 도착하면 CP(Critical Pathway)를 가동하는데 신경과 전문의의 진찰과 CT, 혈액검사 등을 거쳐 혈전용해술과 동맥혈전제거술 시행 여부를 결정하려면 최소 30분~1시간 가량 걸린다”고 설명했다. 첫 병원 선택이 환자 예후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반복되는 구급차 뺑뺑이 사태는 구멍뚫린 뇌졸중 치료 시스템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대한뇌졸중학회에 따르면 뇌졸중 환자의 전원율은 9.6~44.6%에 달한다. 의료 인프라가 좋다는 수도권조차 6명 중 1명은 첫 병원에서 치료가 어려워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경증 환자들이 대형병원 응급실로 몰리는 과밀화에서 근본 원인을 찾는다. 권역응급의료센터조차 경증 환자로 넘쳐나기 때문에 분초를 다투는 응급 심뇌혈관 환자를 받을 여력이 없다는 얘기다. 실제 응급의료통계연보에 따르면 2021년 응급실 내원 환자의 72.5%는 자동차, 1.2%는 도보로 내원했다. 정작 119 구급차로 내원한 환자는 22.1%에 그쳤다. 응급실 중증도 분류 및 진료 결과를 살펴보면 기형적인 통계수치의 배경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한국형 응급환자분류도구(KTAS) 4~5레벨로 꼭 응급실이 아니어도 되는 환자가 50.5%로 절반이 넘는 데다 74.3%가 증상이 호전되어 응급실에서 귀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안성환 조선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정부는 중증응급의료센터를 40개에서 60개로 늘린다지만 인프라 부족은 근본 원인이 아니다. 직접 내원하는 환자는 진료 거부가 불가능하다보니 응급실에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환자들이 병상을 차지하는 게 문제”라며 “걸어오는 환자를 받느라 실려오는 환자를 못 받는 셈”이라고 말했다.
중증 응급질환의 실질적인 치료를 담당하는 전문진료과가 응급의료 시스템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도 골든타임을 놓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현행 제도상 119 구급대와 직접적인 컨택은 응급의학과만 가능하다. 실제 치료는 심장내과, 신경과, 신경외과 등 전문진료과의 전문의가 담당하는데 전원 여부는 응급실 상황에 따라 응급의학과가 결정한다.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응급실에 도착하고도 수술할 의사가 없으면 또다시 구급차에서 치료 가능한 병원을 찾아야 하다보니 두 번째 병원 이송마저 늦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이경복 대한뇌졸중학회 정책이사(순천향대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응급의료 체계와 배후 진료과의 연계 없이는 응급실 뺑뺑이 사망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없다”며 “중증 환자 치료를 담당할 권역심뇌혈관센터를 확충하고 트리아제부터 진단, 이송 치료 등 전체 과정을 관리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경진 기자 realglasses@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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