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안보 정쟁화 중심에 선 대통령실…‘편가르기’가 부른 극한대치
윤석열 정부 들어 외교·안보 이슈가 수시로 정국 블랙홀로 진화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해 미국 방문 당시 비속어 논란에 이어 대일 외교 ‘선제적 양보’ 논란, 미국의 한국 국가안보실 인사 도청 의혹이 줄지어 번졌다. 그때마다 야당 등의 비판→ 대통령실의 ‘정치적 음해’ 규정 → 야당 반발 극대화 → 강 대 강 대치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됐다. 윤 대통령의 편가르기식 대응 속도전이 초당적 사안인 외교·안보 문제의 정쟁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통령실은 17일 야당이 미국의 도청 의혹 대응과 관련해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해임을 요구한 데 대해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 차장이) 외교 최일선에서 일정을 챙기고 있는데 지금 (미국과) 협상하는 당국자를 물러나라고 한다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 이날 오전 국회 국방·외교통일·운영·정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김 차장 해임요구서를 대통령실 민원실을 통해 접수했다. 김 차장이 지난 11일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도청)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며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 등을 문제삼았다.
외교·안보 사안이 진영간 강 대 강 대치 이슈로 비화한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 논란은 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단독 통과시키는 사태로 나아갔다.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서 일본에 면죄부를 준 지난달 한·일 정상회담 후폭풍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에 더해 미국의 도청 의혹까지 정쟁화하며 외교·안보 이슈가 충돌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는 일이 반복되는 중이다. 초당적 문제인 외교·안보 이슈가 연거푸 정쟁화하는 상황은 이례적이다.
대치 상황이 심화하는 데는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정치적 의도가 깔린 반대’로 치부하는 대통령실의 접근 방식 문제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충분한 정보 공유나 소통 없이 정부 입장을 내놓은 뒤 비판이 일면 즉시 이를 정치적 반대세력의 목소리로 낙인찍어 국면 전환에 나서는 모습이다. 그간 윤 대통령이 외교·안보 사안을 두고 직접 야당 지도부를 만나 설득하는 사례도 전무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선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선제적 양보를 한 뒤 비판 여론은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3월 21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직접 이같은 상황 인식을 밝혔다.
미국의 도청 의혹도 유사했다. 대통령실은 초반부터 “문서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강조한 뒤 이어지는 의혹 제기는 정치적 목적이 깔린 것으로 판단했다. 용산 대통령실 건물 내 도청 의혹을 제기한 야당에는 “한·미동맹을 흔드는 ‘자해행위’이자 ‘국익침해 행위’”(지난 11일 대통령실 공식입장문)라고 했다. 지난 14일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도청 의혹을) 정치권에서 정쟁으로 (다루고), 언론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다룬다거나 하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며 재차 야당에 화살을 돌렸다.
결국 정부 대응의 불투명성과 편가르기식 접근이 극단적 반발과 정치쟁점화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5월 국회 연설에선 “우리가 직면한 위기와 도전의 엄중함은 진영이나 정파를 초월한 초당적 협력을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며 협치를 강조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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