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자판기에서 마약해독제를 사게 되는 날
해독제 처방 없이 판매 승인
한국도 제대로 대처 못하면
미국처럼 되지 말란 법 없어
'나르칸(Narcan) 스프레이 사용법.' 요즘 미국 언론에서 자주 보이는 기사다.
나르칸은 헤로인, 펜타닐 등 마약성 진통제 성분인 오피오이드 과다복용자의 급성중독을 치료하는 스프레이형 해독제로, 코에 뿌리는 것만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최근 이 약을 처방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승인했다. 대형 슈퍼나 편의점 등에서 이 약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워싱턴DC 등 일부 지역에서는 자동판매기에서도 구할 수 있게 된다.
미국 정부가 마약 해독제를 쉽게 살 수 있도록 하고, 사용법을 널리 알리는 것은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퍼진 마약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미국에서 오피오이드 과다복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021년 기준 10만6000명에 달한다. 5분에 1명 꼴이다. 펜타닐 중독이 교통사고, 총기사고를 제치고 18~49세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할 정도다. 10대 사망자도 1100명에 달해, 이미 많은 주에서 학교에 해독제를 비치하고 있는 형편이다.
해독제뿐 아니라 펜타닐 테스트키트 역시 널리 쓰이고 있다. 어떤 약이나 식품에 마약 성분이 들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졸려 하거나 반응성이 떨어지는지, 말을 더듬거나 팔다리에 주사 자국이 있는지 등 마약 사용 징후를 살피는 것도 부모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됐다. 학교에 가는 자녀에게 알약이나 알록달록한 사탕을 주의하라고 당부하는 건 기본이다.
펜타닐은 고통이 극심한 암 환자 등에게 극소량 투약하는 초강력 진통제지만, 인터넷 발달과 합성마약 대량생산으로 펜타닐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좀비처럼 거리를 배회하는 중독자를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핼러윈에 어린이들이 받는 사탕 바구니에 색색의 펜타닐이 들어가고, 평범한 직장인이나 주부들까지 펜타닐에 중독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펜타닐의 중독성은 헤로인의 50배, 모르핀의 100배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마약을 공공의 적(Public enemy) 1호로 지목하고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지 50년이 지난 미국의 현실이다.
마약은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2017년 1만4123명이던 마약사범은 지난해 1만8395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올해는 지난해 기록을 능가할 전망이다. 마약범죄가 클럽 등 특정 장소나 연예인 등 특정 계층을 넘어 일반인, 학생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파고들면서 전체 마약사범 가운데 10∼20대 비중도 30%를 넘어섰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고등학생에게 마약음료를 마시게 한 후, 부모에게 금품을 요구한 신종 범죄까지 등장해 충격을 줬다.
정부는 마약범죄 특별수사본부를 꾸리고 '마약과의 전쟁'에 나서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멕시코에서 유입되는 펜타닐을 막기 위해 국경 관리를 강화해도 마약 유통망이 더 교묘하게 확산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마약 단속은 쉽지 않은 일이다. 텔레그램이나 다크웹을 통해 마약을 사고팔고, 가상화폐로 대금을 지급한 후, 특정 장소에 마약을 숨겨 놓으면 찾아가는 '던지기 수법'이 자리 잡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약은 임계점을 넘으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번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지금 싹을 뽑아야 한다. SNS가 마약 거래의 온상이 되지 못하도록 수사를 집중하고, 신종 마약범죄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진다면, 학교 가는 아이들 손에 해독 스프레이와 마약 테스트키트를 쥐여주는 것이 우리 일이 될 수도 있다. 학원 가는 아이들에게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료를 마시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현실이 되지 않았나.
[이은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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