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마약 피싱' 일당, 절박한 수험생을 노렸다

배준우 기자 2023. 4. 17. 17: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상 깊이 침투한 마약, '팬데믹' 선언해야 한다는 의견도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 일대에 일명 '마약 음료'가 유포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지난 2주간 전국이 떠들썩했습니다. 경찰이 수사해 보니 중국 내 보이스피싱 조직이 마약을 미끼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저지른 범행으로 파악됐습니다. 대범하게도 수험생인 자녀를 원격으로 인질 삼아 부지불식간에 학부모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부모들의 역린을 건드린 것 아니냐는 평가도 다분합니다.

①'교육 1번지'라 불리는 서울 대치동 학원가 일대를 선정해 ②저녁 시간 즈음 학원을 오가는 미성년자인 학생들에게 성적 향상을 빌미로 마약 성분이 담긴 음료를 먹게끔 유도한 뒤 ③부모들의 전화번호를 파악해갔다는 점에서 ④그것도 모자라 학부모들을 상대로 금전을 요구하는 취지의 협박을 일삼았다는 점에서 대치동 엄마들을 비롯한 학부모들의 충격과 공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왜 중요한데? - 수험생들에 치명적


해당 보이스피싱 조직의 '심부름꾼' 역할을 했던 아르바이트생 4명을 통해 유포된 마약 음료는 18병에 달한다고 경찰은 밝혔습니다. 경찰은 이 가운데 8병이 실제로 전달돼 피해자들이 시음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현 시점 기준으로 다행히 신체에 이상 반응을 보이는 학생이나 학부모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시음 행사 당시, 1개 병에 담긴 마약 음료를 거의 다 마신 일부 학생의 경우 음료 섭취 시점을 기준으로 상당 기간 동안 정신착란 등의 증상을 보였던 것으로 경찰은 파악했습니다. 특히나 장시간 집중력과 주의력이 사실상 성적으로 직결되는 수험생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이러한 마약류 섭취는 (학생 개인의 편차를 감안하더라도) 입시를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수험생 입장에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 마약 음료 속 필로폰 함량은?

일부 학생이 신체에 이상반응을 보였다니 마약 음료의 제조 방식과 성분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마약 음료는 어떻게 제조됐을까요. 그리고 여기에 함유돼 있던 필로폰의 양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마약 음료 제조책 20대 남성 길 모 씨는 중국 내 '윗선'인 이 모 씨의 지시를 받아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자택에서 마약 음료를 제조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씨의 지시를 받아 굳이 중국산 우유인 '왕자(旺仔)' 우유에 필로폰을 탔습니다. 참고로 이 중국산 우유는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밀크티와 외관상 유사한 색을 띱니다.

문제는 길 씨가 해당 중국산 우유에 섞었던 필로폰의 양입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경찰로부터 감정을 의뢰받은 마약 음료 7개 병에 대해 필로폰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 분석했더니, 100ml 당 최대 0.16mg의 메스암페타민 성분(이하 필로폰)이 검출됐습니다. 국과수는 당초 학생들의 신체 반응 등을 토대로 0.03mg 안팎의 필로폰이 검출된 것으로 잠정 추정했었는데, 정밀 감정 결과 이 수치를 훨씬 웃도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 검출되자, 국과수는 더 정확한 정보 제공을 위해 위해도 평가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통상 필로폰 투약 범행 1회에 쓰이는 용량이 0.02~0.03mg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대 대여섯 배에 달하는 필로폰이 함유돼 있었던 겁니다. 특히 필로폰을 녹이는 용액이 물이 아니라 우유일 경우, 필로폰이 온전히 녹아들지 않아서 일부는 침전물처럼 가라앉게 된다는 점도 우려의 요소로 꼽힙니다. 다만, 다행인 건 혈관 투약이나 호흡기 투약에 비해 액체로 희석된 경구 투약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더디며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점입니다.

마약 관련 한 전문가는 "생각보다 많은 양이 검출됐다"라며 "한 개 병을 다 들이마셨을 경우 심장이 빨리 뛰거나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상 반응을 보였거나 이상 반응이 우려되는 피해자들의 경우 추적 관찰을 통해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 마약 구입 비용 = 치킨값?

경찰 등에 따르면, 현재 암페타민 계열의 메스암페타민(필로폰) 1회 투약분을 구하는 데 드는 경제적 비용은 평균 2~3만 원에 달합니다. 오죽하면 '1치킨=1마약'이라는 냉소 섞인 농담이 돌고 있을 정도입니다. 10년 전 10만 원의 비용을 들여 구했던 것과 비교하면 진입장벽이 매우 낮아진 상태입니다. 마약 합법화 국가들로부터 마약이 국내에 계속 들어오고 있고 이에 따라 물량이 많아지면서 단가가 낮아지는 데다 텔레그램 등 메신저로 증거를 인멸할 수단이 확보돼 있다는 점이 그 이유로 꼽힙니다.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를 먹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공분을 자아내고 충격적인데, 그러한 마약이 일상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7~8년 전만 해도 마약 관련 취재를 하거나 기사를 작성할 때 한국을 가리켜 '마약 청정국'이란 수식어가 붙어 다니곤 했습니다. 물론 그때에도 마약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의미라기보다 마약 청정국의 지위를 잃게 될까 우려된다는 의미에 불과했습니다. 우려는 어느덧 현실이 됐습니다.

배준우 기자gate@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