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법정에선 현장사진을 보지 않는다, 이어폰으로 듣는다
컴퓨터와 3차원(3D)펜, 그리고 한쌍의 이어폰.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민사5부 판사가 판결문을 쓸 때 필요한 것들이다. 여느 판사들은 판결문을 쓸 때 두꺼운 사건기록을 들춰보지만, 김 판사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사건기록을 듣는다. “제게는 노트북이 철제 캐비닛이고, 이어폰 두짝이 자료를 읽는 눈입니다”(저서 <뭐든 해봐요>). 국내 시각장애인 2호 판사인 김 판사는 자신이 일하는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중앙지법은 17일 12시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오는 20일 제43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김 판사와의 대화' 행사를 진행했다. 김 판사는 지난 2012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니던 중 의료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2015년 제4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이후 서울특별시 장애인인권센터 변호사로 활동하던 김 판사는 2020년 10월 법관으로 임용됐다.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지난 2012년 최영 부산지법 판사 이후 두번째다.
판사는 수많은 사건 기록을 읽으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김 판사는 서른살에 시각장애인이 돼 점자에 서툴다. 보이지 않는 그에게 기록을 소리로 바꾸는 건 필수다. 재판을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각 사건 기록을 특징에 맞게 워드, 한글프로그램, 엑셀 등으로 바꾸는 일이다. 예를 들면 기록이 사진으로 돼 있으면 속기사가 사진 속 내용을 한글 문서에 타이핑 해준다. 이렇게 사건 기록이 만들어지면 김 판사는 화면의 글자를 소리로 바꿔주는 ‘스크린리더’를 통해 비로소 기록을 읽게 된다. 시시티브이(CCTV) 영상이나 사진을 봐야 할 때는 속기사의 설명을 듣고 이해한다. 이렇게 모든 기록을 귀로 듣는다.
재판 외 업무까지 속기사의 도움을 받기는 힘들다. 김 판사는 “휴가원을 낼 때 누구한테 부탁해야 할지, 재산 등록을 할 때는 (또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답이 없습니다”라며 “(재산 등록을 도와주는) 배석 판사는 제가 돈이 얼마나 있는지 다 아십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장애인인권센터 변호사로도 활동했던 김 판사는 수사·재판 과정에서 장애인 지원제도에 대한 고민이 많다. 김 판사는 “경찰에 발달장애인 전담 경찰관이 있고, 법무부에는 진술조력인 제도가 있다. 전담 경찰관은 관련 교육을 5일 받는다. 인원도 충분하지 않아서 (장애인) 사건이 전담 경찰관에게 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고령자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생활을 방해하는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인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기술 도입에도 관심이 많다. 김 판사는 “‘어떤 영화가 유행하는데 봤냐’는 건 일상적인 이야기인데 제가 그 이야기에 못 끼면 마음이 되게 힘들겠죠. 이렇게 시각장애인에게 화면해설 영화는 굉장히 중요하다”며 “영화관이 시각장애인에게 화면해설을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한 사건이 지금 대법원에 가있다”고 말했다.
김 판사는 사고로 시력을 잃었을 땐 “내 인생이 끝났구나” 절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고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뭐든 해 봐요>라는 수필집을 내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을 강조한다. 이렇게 강인한 정신력은 그가 평소 즐기는 운동과도 관련이 있다. 2013년 친구의 추천으로 시작한 마라톤은 최근에도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김 판사가 즐기는 운동이다. 시각장애 구기종목인 ‘쇼다운’은 탁구과 비슷한 경기로, 두 선수가 마주보고 공을 치면서 상대방 쪽 골망에 공을 넣어 득점하는 경기다. 김 판사는 지난 2019년에 국가대표 선수로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했다.
이날 행사는 점심시간에 진행됐지만 동료 판사 등 법원 판사들도 김 판사의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왔다. “동료들이 조금 더 신경써줬으면 하는 게 있냐”는 한 판사의 질문에 김 판사는 “엘리베이터에서 혹시 저를 만났을 때 누구인지 말로 해주면 감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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