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과학은 없다]① ‘지방의 과학화’ 외친 지 25년…서울·경기·대전만 혜택 봤다
여섯 차례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에도 악화
인력·연구장비 등 세부 지표도 수도권 쏠림 심각
정부가 제1차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을 발표하며 지역의 과학 생태계 조성에 나선 지 올해로 25년이 지났다. 하지만 국가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서 예산과 인력 같은 지표를 보면 수도권 쏠림 현상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지역의 과학기술 혁신 역량을 점검하고, 수도권과 지역이 함께 성장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 봤다.[편집자 주]
20세기말 다음 세기의 시대적 조류는 지식, 정보화 사회로의 진전과 함께 세계화, 지방화 시대가 동시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의 지방화는 21세기 지식기반과 정보화 사회를 위한 핵심적인 전략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은 그 동안 중앙정부 주로로 추진되었고 지역적으로도 편중되어 효율적인 혁신체제 구축이 부진하였다. (중략) 이에 따라 지방-중앙정부간 긴밀한 협조체계 아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방과학기술진흥 시책이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1999년 12월 제1차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 수립 배경 설명 중
정부는 1999년 12월 ‘과학기술의 지방화’라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1차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을 발표했다. 1998년부터 사전 기획과 조사 연구사업에 착수했고, 이듬해 1월에는 ‘국가과학기술혁신을 위한 특별법’을 개정해 5년마다 지방과학기술종합계획을 수립할 법적인 근거를 만들었다. 1년에 걸친 준비 끝에 지역에 과학기술 거점을 육성하고, 인력 양성과 산·학·연의 협력을 지원할 제도적인 근거도 마련했다.
당시 정부가 지방과학 육성에 나선 건 수도권과 지방 과학기술 역량의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1999년 통계를 보면 국가(R&D)투자의 75%, 연구 인력의 66%, 국가연구기관의 48%가 수도권과 대전 대덕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자치단체의 총예산 대비 R&D 예산 비중은 1997년의 경우 0.77%에 불과했다. 수도권과 대전 대덕에 국가 과학기술 역량의 대부분이 집중된, 머리만 크고 팔과 다리는 작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해결하는 게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첫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을 수립한 지 25년이 지난 현재의 통계는 어떨까.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놀라울 것도 없이 수치는 변한 게 없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조사한 광역 시도별 총 연구개발비 추이에 따르면 2020년 정부와 민간을 포함한 국가 연구개발비는 93조717억원으로, 이 중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이 64조4137억원, 여기에 대전 대덕을 포함하면 73조2874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과 대전이 전체의 78.7%로 25년 전보다 크게 개선된 게 없다.
R&D 인력은 어떨까. 대전과학산업진흥원이 2020년에 조사한 자료를 보면 전국의 R&D 인력은 74만7288명으로, 이 가운데 수도권의 인력이 47만234명, 대전에 5만2030명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수도권과 대전에서 일하는 인력이 전체 R&D 인력 가운데 10명 중 7명(69.8%)에 이르는 셈이다.
R&D 인력은 조사마다 조금씩 수치가 다르지만 대부분 두 지역의 비중이 70%에 육박하는 건 다를 게 없다. 연구개발비와 연구인력 모두 수도권과 대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25년 전보다 조금씩 높아진 걸 알 수 있다.
정부가 물론 손만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1999년 제1차 지방과학기술진흥계획을 시작으로 꾸준히 관련 정책을 발표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월에도 제6차 지방과학기술진흥계획을 내놨다. 지역이 스스로 지역에 특화된 과학기술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면 중앙정부는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체계를 내세웠다.
하지만 조선비즈가 지역에서 만난 대다수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정부가 내세우는 캐치프라이즈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지방과학기술의 붕괴는 학령인구 감소와 기업의 지역 기피 등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인데, 정부에서는 과기정통부 차원에서만 단순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성진 KISTEP 지역혁신정책센터장은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이 1차부터 6차까지 25년 동안 핵심 키워드를 보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도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인 과제를 6차 계획부터 추진하려 한다”고 말했다.
지방의 과학기술 혁신에 들어가는 예산이 결코 적은 건 아니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 간 광역 시도별 연구개발비 추이를 보면 연 평균 증가율이 7.61%에 이른다. 문제는 수도권의 성장 속도를 지방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구개발비가 가장 많은 경기와 서울의 연 평균 증가율은 각각 9.23%, 8.32%로 전체 평균을 웃돈다. 이 기간에 충북은 오히려 -2.26%로 감소했고, 대구와 광주, 경북 지역은 연 평균 증가율이 4%에도 못 미친다.
연구원 수도 마찬가지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전체 광역 시도의 연구인력 증가율은 4.91%인데 서울은 6.10%, 경기는 5.42%로 평균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뜩이나 수도권이 지방보다 앞서서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뛰는 속도도 더 빠른 셈이다.
현장에서 만난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문제는 또 있다. 바로 기업의 부재다. 흔히 과학기술의 연구 주체로 대학이나 연구소를 흔히 떠올리지만, 전문가들은 기업 없이는 연구 환경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단순히 산·학·연의 협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에 기업이 없으면 대학의 석·박사급 연구 인력도 그 지역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호원 제주대 대학원장(화학공학원 교수)은 “학부생이 감소하는 것에 대한 경고는 많이 나오는데 막상 현장에서 보면 대학원생이 줄어드는 게 더 심각하다”며 “대학의 연구 주체는 교수와 대학원생 연구자인데 졸업 후에 취업할 자리가 없다보니 지역에 있는 대학은 대학원생을 구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수도권에 주요 대학이 집중돼 있는 상황에서 지역이 자체적으로 육성한 얼마 안 되는 연구인력마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역별 대기업 수를 보면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 49개로 가장 많고, 경기가 6개, 인천이 2개로 뒤를 잇는다. 광주와 대전, 울산, 전북, 경북, 경남, 제주에 각 1개씩만 있을 뿐이다. 벤처기업 수도 마찬가지다. 경기가 1만1637개로 가장 많고, 서울이 1만450개로 뒤를 따른다. 두 곳을 제외하면 부산이 2024개로 유일하게 2000개를 간신히 넘겼다.
이 원장은 “청년이 지역에 남으려면 일자리가 가장 중요한데, 제주도에는 일자리가 없어도 너무 없다”며 “기업 입장에선 우수한 학생을 지역에서 구하기 힘들다보니 제주도에 생산라인을 짓지 않고, 학생들은 일자리가 없으니 대학에서 연구를 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악순환은 단순히 연구 인력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지역에 없다 보니 첨단 연구장비 같은 인프라도 기업들이 가까이 있는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다. 광역 시도별 국가연구기설장비 구축 건수를 보면 국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모여 있는 대전이 624대로 가장 많고, 서울이 449대, 경기가 388대로 그다음을 차지했다. 반면 강원과 제주는 각각 79대, 49대로 100대도 되지 않는다.
연구 인력도 없고 연구 장비도 부족하니 특허 출원, 기술료 수입 같은 2차 통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지역별 기술료 수입을 보면 2019년 기준으로 전국 평균이 연간 151억3000만원인데, 평균을 넘는 지역은 대전 660억2000만원, 서울 642억9000만원, 경기 459억2000만원으로 단 세 곳에 불과하다. 나머지 지역은 광역지자체인데도 연간 100억원을 넘기지 못하는 곳이 태반이다.
정부는 지역 과학기술 거점 역할을 하기 위해 출연연 지방분원을 곳곳에 설립했지만 이 역시 대부분 인력과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지역 정치인들의 요구로 우후죽순 들어섰지만, 만들어 놓기만 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중견기업연구원이 출연연 지역조직 운영 실태를 분석했더니 논문이나 기술료 수입, 특허출원 같은 연구 성과가 ‘0′건인 곳이 적지 않았다. 출연연을 관리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2020년 출연연 지역조직 53개를 평가했는데 ‘우수’ 등급을 받은 곳은 단 4개에 불과했다. ‘미흡’을 받은 곳이 13개로 3배가 넘는다.
김성진 센터장은 “지자체장과 지역 정치인들의 요구로 출연연 분원이 설립된 곳이 많은데 규모가 작다보니 실패 사례만 쌓이고 있다”며 “지역에 필요한 분야를 중심으로 규모를 키워서 연구 거점으로 삼는 정책이 필요한데 그런 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역의 과학기술혁신 역량을 수치로 보여주는 ‘지역 과학기술혁신 역량평가지수(R-COSTII)’는 서울과 경기, 대전의 ‘빅3′ 체제가 얼마나 공고한 지 잘 보여준다. 이 지수의 1~3위는 경기, 서울, 대전으로 조사를 시작한 이래 순위가 바뀐 적이 없다. 서울과 대전이 2위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할 뿐이었다. 2021년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R-COSTII’가 평균을 넘는 지역은 경기, 서울, 대전 세 곳뿐이었다. 조사를 진행하는 KISTEP은 “최근 8년간으로 좁혀서 봐도 경기, 서울, 대전 등 상위권 3개 지역은 전체 평균의 약 1.63~2.16배의 혁신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며 “최상위 지역인 경기와 최하위 지역인 제주의 격차가 오히려 확대되는 등 지역 과학기술혁신 역량의 상하위 간 차이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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