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지민의 빌보드 1위가 허문 케이팝의 한계
음원 판매량 기록적이지만 라디오 에어플레이 횟수 낮아…팬덤 의존 줄일 방법은
방탄소년단 지민의 첫 솔로 앨범 《페이스》(FACE)의 타이틀곡 <라이크 크레이지>(Like Crazy)가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Hot)100’ 1위로 데뷔했다. 케이팝 솔로 가수로서는 최초다. ‘방탄소년단이 방탄소년단 한’ 다음 날엔 늘 그렇듯, 소속사 하이브의 주가가 7% 올랐다. 11년 전 핫100 2위에 오른 <강남스타일>이 소환됐고, 지민이 얼마나 많은 ‘한국인 최초’ 기록을 세웠는지 중계하는 뉴스가 쏟아졌다.
화장하고 스키니진 입은 케이팝 남자 아이돌
<라이크 크레이지>의 성공은 케이팝이 언어의 장벽을 넘는 새로운 모델을 보여준다. 넷플릭스 드라마 같은 감각적인 <라이크 크레이지> 뮤직비디오에는 다양한 젠더와 섹슈얼리티 이미지가 등장한다. ‘순한 맛’이긴 하지만 클럽을 배경으로 구애하는 동성 커플, 깊게 키스하는 남녀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간다. ‘젠더리스’(Genderless·성별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음) 한 분위기를 완성하는 건 단연 지민의 존재감이다.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시키는 전위적인 스타일링과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그는, 현대무용에 기반한 독창적인 표현으로 <라이크 크레이지>의 세계관을 시적으로 승화하고 케이팝의 새로운 남성상을 제시한다.
‘화장하고 스키니진을 입은’ 케이팝 남자 아이돌은 서구사회의 ‘아시아 남성은 남성적이지 않다’라는 혐오를 어쩌다보니 전복했다. 케이팝은 젠더 다양성을 옹호하는 진보적 콘텐츠로 인식되며, 전복을 통한 쾌감이 덕질의 매력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그러나 ‘유교국’에서 나고 자란 케이팝은 논쟁으로부터 안전제일을 추구하고, 다양성보다 통합성을 중시하며, 공격적으로 기득권으로의 편입을 시도한다. 이러한 실상으로 ‘화장하고 스키니진은 입은’ 상태에 마네킹처럼 멈춰있었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충분하지 않지만 서구사회에서 다양성의 한 상징이 된 케이팝의 역할에 부응한다. 지민의 시도는 방탄소년단이 인종과 성정체성의 차이를 넘은 자기 긍정을 말한 유엔 총회 연설,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 반대 등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유산과 연결되며 진정성을 얻는다.
케이팝에 후크송(반복적인 가사)이 넘치는 이유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서다. 가사보다는 감탄사에 가까운 짧은 단어가 반복되거나 챌린지 영상을 소환하는 포인트 안무가 대표적이다. <라이크 크레이지>에는 “라이크 크레이지”라는 가사가 없다. 후렴구와 연동되는 직관적인 제목이나 ‘중독성 있는 후크’가 없다. 대신 지민은 공감으로 언어의 장벽을 넘는다. 《페이스》는 팬데믹 동안 지민이 겪은 혼란과 공허를 음악으로 풀어낸 자전적인 앨범으로, <라이크 크레이지>는 국적이 다른 커플이 직면하는 냉정한 현실을 그린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가 모티프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영화에서 사랑을 초월하는 거대한 감정의 접두어로 쓰인다. 곡은 그 폭발적 정서를 문학적 가사와 고전적 팝의 흐름으로 담았다. 지민은 드라마틱하게 뽑아낸 부드러운 보컬로 쓸쓸함과 혼란을 포용한다. 결과적으로 영어 버전이 번안곡처럼 들리는 케이팝의 한계를 허문다.
문제는 <라이크 크레이지>가 케이팝의 한계를 허무는 성과를 낼수록, 소속사 하이브의 역량 또는 한계에 대한 팬들의 의심도 커진다는 점이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2023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주간 음원(다운로드·CD) 판매량 25만4천 건을 기록하며 핫100 1위로 데뷔했다. 빌보드가 2022년 1월 음원 중복 구매를 차트 집계에서 제외하려고 1인당 음원 다운로드 횟수를 주간 4회에서 1회로 바꾼 뒤 케이팝 아티스트가 이룬 첫 1위다. 하지만 집계 항목 가운데 소속사의 프로모션 규모와 연동되는 라디오 에어플레이 횟수는 0에 가까웠다.
2주차 10위 안 전망에도 실제는 45위
대다수 빌보드차트 예측 사이트들은 <라이크 크레이지>가 데뷔 2주차에도 10위 안에 무난히 안착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실제로는 45위였다. 예측과 실제 순위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은 이례적이다. 미국 음악산업 전문지 <히츠 데일리 더블>(HITS Daily Double)의 데이터를 보면, 지민의 2주차 음원 판매량은 12만여 회였으나 빌보드차트 데이터를 유통하는 루미네이트(Luminate)는 88%를 삭감한 1만5천여 회만 집계했다. 이는 10위권에 들기에 부족한 판매량이 아니기에, 2주차 순위를 결정한 건 라디오 에어플레이 횟수였다고 볼 수 있다.
팬들은 1인당 주간 1회 집계 방식이 제대로 적용됐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빌보드의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해시태그 총공’(여러 이용자가 같은 해시태그를 써서 실시간 트렌드 순위에 올리는 행위)을 하고 있다. 또 라디오 에어플레이 횟수를 높이려 방송사 음악 신청 게시판 링크를 모아 공유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언뜻 ‘팬덤 대 빌보드차트’의 대결 구도로 비치지만 그렇지 않다. 상황을 좀더 들여다보면, 기획사가 팬덤의 ‘헌신’에 모든 걸 맡긴 채 주가 상승 등 반사이익만 챙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빌보드차트는 글로벌 시장의 주요 지표다. 이미 케이팝 가수들은 빌보드차트를 의식해 집계가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 1시(미국 동부 시간 0시)에 음반을 발표한다. 하지만 팬들은 기획사가 음반 발표 뒤 빌보드차트 진입을 위한 비용과 노력의 상당 부분을 팬덤에 전가한다고 느낀다.
지민의 팬 연합인 한 트위터 계정은 현 상황에 대해 “앨범 홍보와 모니터링의 많은 부분이 팬덤에 의해 이뤄진다고 본다. 아티스트의 창작물을 제대로 시장에 홍보하는 것은 소속사의 의무이고, 나날이 커지는 케이팝의 규모만큼 프로모션 투자가 필요하지만 충분히 준비되지 않는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앨범·곡 정보가 틀리게 기재된 사실을 발견해 소속사에 알린 것도 팬들이다.
기획사, 팬덤 의존 줄이고 자체 역량 키워야
방탄소년단이 ‘중소기획사 아이돌’이던 2010년대, 팬들은 ‘방탄소년단 문익점’으로서 홍보에 나서야 했다. 방탄소년단이 ‘시가총액 8조원대 기획사 아이돌’이 된 현재도 이 방식에 의존하는 게 옳을까. 케이팝이 글로벌화하며 더 높은 수준의 콘텐츠, 다양성 가치를 포용하는 진취적 시도, 체계적 프로모션 전략이 요구된다. ‘케이팝이 세계를 점령했다’는 자기만족에 갇혀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케이팝의 역할과 영향력을 고민하며 세계의 기대와 호응에 응답해야 할 때다.
최이삭 케이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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