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새벽, ‘마약음료’ 100병이 제조됐다

김송이 기자 2023. 4. 1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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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확인된 첫 ‘마약피싱’ 범죄
중국 마약 유통책·보이스피싱 조직 협업
국내선 아르바이트생 고용해 판촉 위장
안동현 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장이 17일 서울 마포구 마약범죄수사대에서 강남 학원가 마약음료 사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지난 3일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를 나눠주고 학부모에게 협박 전화까지 한 일명 ‘마약음료 시음회’ 사건. 경찰은 이 사건을 마약 범죄와 보이스피싱을 결합한 신종 범죄로 규정했다. 국내에서 ‘마약피싱’ 범죄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마수대)는 17일 마약 음료 제조·전달책 길모씨(25)와 협박전화 번호 조작에 가담한 김모씨(39)를 구속 송치하고, 마약공급책 박모씨(35)를 불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배후로 알려진 중국 내 보이스피싱 조직은 계속 추적 중이다. 경찰의 수사 결과를 토대로 사건 일지를 정리했다.

3월 25일. 길씨는 인천의 한 주택가 지하 복도에 있는 선반 아래에 테이프로 붙어있던 필로폰 10g을 수거했다. 중국의 마약 유통 조직으로부터 마약을 전달할 것을 지시받은 박씨가 ‘던지기 수법’으로 마약을 소분해 선반에 붙여둔 터였다. ‘던지기’란 특정 장소에 마약을 숨겨두면 구매자가 찾아가는 수법이다.

강원 원주의 자택으로 돌아온 길씨는 3일 뒤 우체국 국제 우편을 수령했다. 마약음료를 담을 플라스틱 통과 ‘메가 ADHD’라고 쓰인 라벨지였다.

집 앞에 도착한 택배를 본인 차량 트렁크에 실어뒀다가 집으로 옮긴 길씨는 4월1일 만우절 새벽 자택에서 마약음료 100병을 제조했다. 100mL 용량 플라스틱 1통당 중국에서 유행하는 멸균우유와 필로폰 0.1g을 담았다. 통상 필로폰 1회 투약분으로 알려진 0.03g의 3.3배에 달하는 양이다. 경찰은 미성년자가 한 번에 투약하면 급성 중독에 걸릴 위험이 있는 양이라고 했다.

제조를 마친 길씨는 4월3일 오후 12시21분 퀵 서비스를 이용해 서울로 마약 음료를 발송했다. 같은 날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와 강남구청역 일대에서 2인 1조씩 2개조로 나눠진 아르바이트생들이 택배를 수령했다. 이들은 구인구직 사이트나 대학생 커뮤니티 등에서 일당 15만원짜리 구인공고를 보고 모인 이들이었다. 이들 중 한 명인 20대 김모씨는 그동안 보이스피싱 수거책으로 활동해온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시음회를 열어 학생들에게 음료를 나눠주고 설문지에 학생과 학부모의 인적사항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17일 서울 마포구 마약범죄수사대에서 열린 강남 학원가 마약음료 사건 관련 브리핑장에 현장에서 회수된 증거품들이 놓여 있다. 성동훈 기자

아르바이트생들은 오후 4시52분부터 오후 9시까지 학생들에게 음료 18병을 배부하고 설문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A4 크기의 ‘2023년 메가 ADHD 설문서’ 하단에는 ‘소중한 의견에서 선택된 분들에게 백화점상품권을 드립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이들은 “기억력 상승과 집중력 강화에 좋은 음료수를 개발했다”며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를 건넸다.

4월4일. 범행 윗선은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카카오톡으로 전달받은 설문지의 인적사항을 토대로 협박을 시작했다. “자녀가 마약을 복용했다고 신고할 것”이라고 했다. 4건은 전화를 통한 협박이었고, 2건은 카카오톡을 통한 협박이었다. 피해자 한 명에게는 1억원을 요구했다.

협박 전화에는 중계기 운영자 김씨가 개입했다. 협박 전화에 쓰인 휴대전화 발신번호를 변착시켜줬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전화번호 1개를 변작해주는 대가로 1만원씩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가 관리한 전화번호는 10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김씨에게서 노트북 6대, USB 모뎁 96개, 휴대전화 유심 368개를 압수했다. 그는 피해액 합계 8억2600만원의 보이스피싱 범죄 43건에 연루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마약음료 100병 중 44병은 폐기됐고, 36병은 미개봉 상태로 압수했다고 했다. 2병은 아르바이트생 2명이 호기심에 마셨다고 한다. 배부된 18병 중 학생들이 마신 것은 8병이고, 4병은 학생들이 받기만 하고 마시진 않았다. 경찰은 나머지 6병에 대해 조사 중이다.

경찰은 길씨의 중학교 동창인 이모씨(25)를 이번 사건의 상선으로 보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17일 중국으로 출국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가 중국에 건너간 지난해 10월부터 이번 사건과 관련한 모의 또는 계획이 시작됐다고 본다”고 했다. 이씨는 위챗과 텔레그램 등으로 길씨와 소통하며 마약음료 제조를 지시했다. 중국 국적 박모씨(39)는 마약 음료를 담을 빈 병과 상자, 판촉물을 국내로 배송하는 데 가담했다. 경찰은 박씨 역시 이씨를 통해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이씨와 박씨를 포함해 중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피의자 3명에 대해 인터폴 적색 수배를 요청하고 여권 무효화 조치를 완료한 상태다.

경찰은 일당이 최근 보이스피싱 수사 발달로 수입이 줄자 새로운 유형의 범죄를 기획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마약 중독자를 늘리려 했다기보다는 신종 수법을 모색해 범죄 수익을 늘리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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