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드리면 터져!…이 시대 ‘성난 사람들’ 위한 블랙코미디
마트에서 영수증 없이 화로를 반품하려다 망신당한 대니가 차를 빼는 순간 뒤에서 흰색 고급 에스유브이(SUV)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에스유브이 운전자는 길고 요란한 경적소리만으로도 부족한지 가운뎃손가락을 힘껏 올린다. 그는 오래 준비한 회사 매각 협상이 또 어그러지자 열 받은 에이미. ‘뚜껑이 열린’ 대니는 에이미를 추격하고 둘의 난폭운전은 동네 사람들의 소셜미디어에 화제가 된다.
6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10부작)이 입소문을 탔다. 사소한 계기로 분노의 버튼이 눌린 남녀가 서로 욕하고, 음해하고, 협박하고, 가정을 파탄 내고, 불을 지르며 파국으로 달려가는 이 블랙코미디는 공개 직후 넷플릭스 티브이 드라마 부문 글로벌 3위에 올랐다. 또한 임계점 직전의 분노를 끌어안고 사는 현대인의 어두운 내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성으로 내년도 주요 상 수상이 벌써부터 점쳐지고 있다.
스티븐 연이 연기하는 대니는 한인 2세다. 집수리를 하며 겨우 먹고사는 전형적인 미국의 하층 노동자로 동생도 친구들도 게으른 백수들뿐이다. 중국계 이민자의 외동딸로 자란 에이미(앨리 웡)는 플랜테리어(식물을 활용한 인테리어) 사업으로 성공해 좋은 집과 부자 친구들을 둔 인물. 피부색 말고는 겹치는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숨 막힐 정도로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숨기기 위해 늘 쓰고 있어야 하는 가면이다.
대니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미국인이지만 미국에서 모텔을 하다 망해 한국으로 쫓겨가다시피한 부모님을 모셔오고 백수 동생도 건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리는 이른바 ‘케이(K) 장남’이다. 에이미는 정착 초기 늘 다투던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가족을 버거워하면서도 깨지 않기 위해 버둥거린다. 백인 부자 친구들 앞에서는 “선불교의 온화함을 지닌” 동양인 친구 역할을 해야 한다. 죽일 듯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둘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가면을 벗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서로에게 악담을 하다 비켜달라는 다른 운전자에게 퍼붓는 ‘쌍욕 앙상블’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웃기는 장면.
오랫동안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에서 구두쇠나 소심한 모범생 등 놀림감으로 그려졌던 아시아계 이민자 서사는 최근 <미나리>(2020)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처럼 고단한 삶의 역사를 비추거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처럼 주류사회에서의 성공을 보여주는 등 다양하게 바뀌어왔다. <성난 사람들>은 한 단계 더 도약한다. 사실 대니나 에이미가 가진 분노는 이민자들의 것만은 아니다. 온라인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사이버 불링이나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보복운전,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층간소음 폭력 등 갈수록 많은 이들이 버튼만 누르면 터져버릴 듯한 분노를 누르고 산다. <성난 사람들>은 이처럼 인종과 지역을 넘어서는 공감대에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들의 특수한 환경을 녹이면서 이민자 서사에 전에 없던 보편성과 입체성을 담아냈다.
미국 드라마 <데이브>의 대본을 쓰고 <성난 사람들>를 기획한 이성진 작가는 3년 전 실제로 로드레이지(난폭운전)를 당하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최근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많은 이들이 늘 남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이후 로드 레이지가 늘어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가 진짜 악화시킨 건 고립감과 외로움”이라고 하면서 <성난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스티븐 연처럼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란 이 작가는 드라마 안에 한국 이민자를 대변하는 코드들을 빼곡히 넣었다. 대니는 덩치가 산만한 20대 동생을 여전히 열두살 아이 취급하며 계란을 넣어 라면을 끓여 주고 “김치찌개 끓여놓고 집에서 기다리는 참한 한국인 아가씨를 만나야한다”고 말한다. 정작 동시대 한국인들에게는 잊히는 가부장성이 이민자 사회에서 자란 그에게는 남아있다. 작품은 교포들에게 특수한 의미를 지니는 한인교회도 흥미롭게 보여준다. 일거리를 얻어보려고 오랜만에 교회에 나간 대니가 찬송을 듣다가 눈물을 쏟는 장면은 이민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박혀있는 외로움과 고단함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문학적이고 모호한 회차별 제목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내 속에 울음이 산다’(3화) ‘나는 새장이라네’(7화) 는 각각 실비아 플라스와 카프카의 문구로 모든 제목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썼던 문장에서 가져왔다. 특히 마지막 회 ‘빛의 형상’은 칼 융이 썼던 “깨달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어두움을 의식하면서 온다”의 일부로 이성진 작가는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이 문장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말했다.
원제 <비프>(Beef)는 ‘불평하다’는 뜻. 이성진 작가와 주연 배우 스티브 연, 그리고 연출자인 제이크 슈레이어는 마블스튜디오 신작 <썬더볼트>에서 다시 손잡는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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