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차정숙’ 엄정화, 의사면허 휘두르며 인생찾기 나서다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모든 것이 얼그러진 것은 모두 그 방이 너무 더웠기 때문이었다.
산행하다 다리 삐끗한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일까? 일행 중 한 명이 부축해 내려가는 건 너무 당연한 거고, 다만 그 당사자가 그 애였을 뿐인 거다. 그 애로서도 그렇다. 나는 다리를 다쳤고 남들은 산행 중이다. 일행을 다시 쫓아갈 수도 없고 다친 나를 혼자 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뻘쭘한 채 내 발목에 냉찜질을 해줄 수밖에..
여기까지 하나도 문제될 게 없는, 보편타당한 상황이었다. 우리 둘 누구도 주인 아주머니의 오지랖 배려로 보일러 온도가 치솟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또한 외부 온도가 몸 속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상상도 못했다. 그저 어느 순간 우린 땀을 흘렸고 걸친 옷이 거추장스러웠으며 각자의 목으로 구르는 땀방울만이 눈을 가득 사로잡았을 뿐이다.
아, 청춘! 그 왕성한 생식력이여! 그렇게 더 이상 홀몸이 아니게 되었고 그 애와 나는 우리의 책임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차정숙’이 유쾌한 스타트를 끊었다. 의대 졸업 후 20년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마흔 중반 여성의 레지던트 도전기가 드라마의 주요 골격이다.
공부 잘하던 여고생 차정숙(엄정화 분)은 공부 잘하던 의대생으로 자랐고 그날의 실수로 예과 2학년때 첫 아이를 낳았으며 그럼에도 공부에 매진했으나 끝내 육아로 인해 가정에 들어앉게 된 장롱 의사면허 소지자다.
본인 명의의 소유물은 휴대폰 하나지만, 그리고 아들 딸 포함 집안 권력서열 최하위지만, 잘 나가는 대학병원 의사 사모님, 혹은 청담동 며느리란 명함과 의대생 출신이란 자부심을 은근히 즐기며 그럭저럭 살아왔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급성간염으로 인한 간부전증. 간이식만이 정답인데 마땅히 간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남편밖에 없다. 하지만 남편 서인호(김병철 분)는 시어머니 곽애심(박준금 분)여사의 만류를 핑계삼아 간이식을 미루고 남편의 바닥을 본듯한 배신감에 치를 떨다 운좋게 도너를 만나 기사회생한다.
죽다 살아나보니 돌아본 인생이 바보 같았다. 육체를 처녀시절로 회귀시킬만한 10년 넘는 각방 세월은 그렇다 치자. 의사면허를 두고도 버스에서 쓰러진 응급환자를 방치했다. 20년 넘는 전업주부 끝에 제 명의 소유는 달랑 핸드폰 하나. 남편 자는 모습도 얄미워 따귀도 때려보고 남편 카드로 현질도 해보고 가사일도 접고 대학 친구와 와인도 즐겨보지만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난 뭘 잘했어?”라는 정숙의 질문에 엄마 오덕례(김미경 분)여사는 “공부를 잘했지”라 답해 준다. 그러고보니 문득 공부가 하고 싶다. 이식수술을 집도한 간담췌 전문의 로이 킴(민우혁 분)도 정숙에게 레지던트 재도전을 권했었다. 오랜만에 펼쳐본 의대 교재도 반갑다. 남편에게 의사타진을 해보니 의대시절 정숙보다 공부 못했던 주제에 비웃음으로 대꾸한다.
오기와 열의가 겹쳐 정숙은 레지던트 시험에 도전하고 50점 만점에 49점이란 높은 성적으로 아들 정민과 함께 레지던트 시험에 합격한다.
정숙의 이런 시도는 남편 서인호와 그의 첫사랑이자 현재의 내연녀 최승희(명세빈 분)를 긴장시킨다.
사실 차정숙만큼 두 사람의 세월도 억울할 수 있다. 서인호와 최승희는 소문난 의대 CC였다. 문제의 그 설악산 산행때 최승희는 해외에 나가 있어 불참했고 최승희가 돌아왔을 땐 이미 상황종료였다. 못해본 서인호와의 결혼생활이 오랜 미련으로 남아 언제나 가능할 지, 가능은 한건지 점집을 찾아볼 지경이다.
서인호 역시 마음은 최승희에 두었지만 자신이 벌인 일을 책임지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차정숙과 결혼했다. 아이 둘을 낳은 이후 아내에게서 여자가 느껴지지 않는다. 한번씩 던져오는 아내의 추파는 소름만 돋운다.
그런 두 사람은 미국 연수중 재회했고 국내로 복귀해서도 여전히 밀회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들에게 병원은 차정숙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공간였다. 그러기 위해서 정숙은 그냥 가정에 머물러야 했다. 그래야 스릴있는 막간 데이트도, 학회 핑계 댄 밀회여행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정숙이 그들만의 러브랜드 병원까지 진출하겠다니..
타이틀롤 차정숙은 엄정화에겐 낯선 캐릭터가 아니다. 영화 ‘댄싱퀸’에서도 엄정화는 엄마와 아내에 매몰돼 잊혀진 걸그룹의 꿈을 이뤄냈었다. 영화 ‘오케이마담’에선 시장 꽈배기 아줌마에서 하이재커를 때려눕히는 영웅이 되기도 했다. 세상사 새삼스러울 일 없는 중년 여성으로 기대밖 짜릿함을 선사하는 캐릭터에 특화된 배우라 할 수 있다.
연적 최승희 역의 명세빈도 코믹연기에 강점있는 배우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 ‘내 인생의 스페셜’ 등의 드라마를 통해 그 허당코믹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선보였었다.
드라마 ‘도깨비’ ‘스카이캐슬’ 등을 통해 악역 이미지를 구축해온 김병철 역시 코믹에 일가견 있다. 데뷔 자체를 전통 사극 클리셰를 코믹으로 비튼 영화 ‘황산벌’의 신라첩자역으로 했다. 바늘같이 빈틈없는 외모를 순간순간 망가트리는 허당미가 일품이다.
얄밉고 이기적인 시어머니 전문배우 박준금과 잘 참는 듯 은근히 할 말 다하는 친정어머니 전문배우 김미경도 제자리 찾아 포진했다. 봄맞이 코믹드라마에 걸맞는 캐스팅이다.
그래선지 15일 전국 유료방송 플랫폼 가입 가구 기준 4.9%로 출발한 ‘닥터 차정숙’은 16일 2회분에선 7.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웃음 주는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성장세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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