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건희 유품 ‘인왕제색도’, 소유권 소송에 휘말린 까닭
삼성 측 법률대리인 “원고 주장 사실 자체 명확하지 않아”
(시사저널=이원석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이 이건희 회장의 유품 중 하나인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소유권과 관련해 피소돼 현재 소송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시사저널 취재에 따르면 삼성 일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건 한국의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수집가였던 고(故) 소전 손재형 선생(1902~1981)의 장손인 손원경씨다. 손씨는 손재형 선생이 1970년대 초반 친분이 깊었던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에게 《인왕제색도》를 맡겼으나 두 사람이 모두 작고한 후 삼성 측에서 불분명한 근거로 이를 돌려주지 않고 소유권을 주장해 왔다며 지난해 4월 이재용 회장 등을 상대로 미술품 소유권 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비 갠 후 안개가 자욱하게 낀 인왕산의 풍경을 담은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1751년 그린 작품으로 국내 진경산수화(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동양화) 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삼성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이 작품은 2021년 4월 삼성 측이 '이건희 컬렉션'이라 불리는 이건희 회장의 수집품 2만3000여 점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며 크게 주목받았다. 현재 《인왕제색도》는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회장 기증품 지역 순회 특별전에 전시 중이다.
《인왕제색도》는 이건희 회장과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부부의 첫 번째 수집품으로 알려져 더 특별하게 여겨진다. 홍 전 관장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저희 부부가 최초로 산 미술품은 서예가 소전 손재형씨가 수집한 작품들인데 《인왕제색도》 같은 명품이 포함돼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홍 전 관장이 설명한 대로 《인왕제색도》는 손재형 선생이 1950년대부터 소장해 왔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홈페이지 소장품 안내에서 1957년 최초의 한국 문화재 국외 특별전인 '한국미술명품전(Masterpieces of Korean Art)' 출품 때도 손재형 선생이 소장자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부가 이병철 회장에 맡겼다가 못 돌려받아"
손재형 선생은 '서예'라는 말을 처음 창안하는 등 서예가로서 역사적인 인물임은 물론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고미술품 수집가로서의 열정도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국보 제180호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일본에서 되찾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손재형 선생이 소장했던 《인왕제색도》는 어떻게 이건희 회장 1호 수집품이 됐을까. 또 손 선생의 장손인 손원경씨가 삼성 측의 소유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배경은 뭘까. 사실 《인왕제색도》가 삼성 측에 넘어온 시기나 과정 등에는 여러 얘기가 뒤섞여 있다. 특히 《인왕제색도》를 삼성 측에서 소유한 게 이건희 회장 때부터였다는 얘기와 그 선대인 이병철 회장 때부터였다는 얘기 역시 혼재돼 있다.
손씨의 주장도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손씨의 미술품 소유권 확인 소송 소장과 손씨 본인을 직접 만나 들은 얘기에 따르면, 소송의 배경이 되는 주장은 이렇다. 손재형 선생으로부터 《인왕제색도》를 전달받아 처음 보유한 건 이병철 회장이다. 손 선생이 1970년대 초반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금이 필요했고, 친분이 깊었던 이병철 회장에게 《인왕제색도》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는 것이다. 당시 장남인 손용씨(손원경씨 부친, 2022년 사망)가 직접 《인왕제색도》를 이병철 회장에게 가지고 가서 담보로 맡기고 금전을 차용했다고 한다.
이후 손 선생의 변제가 이뤄지지 못했던 상태에서 그가 1975년경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선생은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로 6년간 병상에 누워있다 1981년 사망했고, 이어 이병철 회장도 1987년 사망했다. 그때까지도 《인왕제색도》는 계속 담보물로서 이병철 회장이 소장하고 있었다는 게 손씨의 주장이다.
이후의 과정에 대해 손씨는 자신의 숙부들(손재형 선생의 차남과 삼남)과 이건희 회장 측의 불법 거래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손씨의 추정은 이건희 회장 측이 두 숙부와 합의해 《인왕제색도》 소유권을 취득하는 대신 그들에게 상당한 대가를 지급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두 숙부는 장남인 손씨의 부친과는 협의 과정조차 없었고, 무단으로 《인왕제색도》 보관 계약서를 탈취해 파기했다고 손씨는 보고 있다.
아울러 손씨는 자신의 두 숙부 중 한 사람은 삼성 소유의 동방빌딩에 대리점을 냈고, 한 사람은 삼성전자 미국 지사장이 된 사실이 있다면서 《인왕제색도》 거래와 해당 사실들에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손씨는 삼성 측에 숙부들의 재직 사실 증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씨는 4월13일 시사저널과 만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근거도 직접 꺼내놨다. 우선 《인왕제색도》를 손재형 선생이 이병철 회장에게 맡긴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해 손씨는 손재형 선생의 유품 속에 있었다는 한 장부를 공개했다. 해당 장부에는 '인왕제색도-호암(이병철 회장의 호) 보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손씨는 역시 손재형 선생 유품 속에서 발견한 것이라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1974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건을 제시했다. 영문으로 쓰인 해당 문건은 해외에 우리의 고미술품을 선보이기 위해 여러 작품에 대한 소개를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곳에 《인왕제색도》도 기록돼 있었다. 문건은 《인왕제색도》에 대해 '수집가 손재형, 보관인 이병철(Coll. Sohn jai hyung, Depositary Rhee byung chul)'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손씨는 부친 손용씨가 2006년 홍라희 당시 리움미술관장에게 《인왕제색도》 등을 돌려달라며 보낸 내용증명을 공개하기도 했다. 내용증명에서 손용씨는 손재형 선생이 '각별한 사이'였던 이병철 회장에게 《인왕제색도》 등 소장 미술품을 맡겼다가 미처 돌려받지 못했다면서 반환을 요청했고,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도 내놨다.
"항간에는 일부 언론 등에서 위 국보급 미술품(인왕제색도)에 대하여 여사님께서 이를 마치 구입한 것 같은 보도들을 접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친(손재형 선생)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위 국보급 미술품을 어느 누구에게도 처분한 사실이 없고, 단지 위 회장님께 보관만을 위탁한 사실밖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족의 장남인 발신인으로서는 어떻게 위와 같은 내용의 보도가 나오게 된 것인지 의아할 뿐입니다." 홍 관장 측에선 내용증명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게 손씨 주장이다.
숙부 "적법 매매…증명할 순 있으나 집안일"
이건희 회장 측이 실제 손원경씨의 숙부 등 손재형 선생의 유족과 《인왕제색도》 등을 거래한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손씨는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삼성 측의 《인왕제색도》 기증 소식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전 관장이) 이전에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던 손홍씨(손재형 선생의 차남, 손씨의 숙부)에 대해서도 늘 고마워하셨다"고 밝힌 사실을 거론했다.
손원경씨는 이미 지난해 2월 기자회견을 갖고 해당 내용들과 관련 삼성 측의 설명을 요구한 바 있다. 이후 삼성 측의 아무런 반응이 없자 결국 두 달 후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고 손씨는 설명했다. 소를 접수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양측 조정에 나섰고, 삼성 측의 법률대리인은 지난해 6월 답변서를 통해 "피고들(이건희 회장의 유족)은 피고들의 소외 망 이건희의 상속인이라는 사실 외 나머지 사실에 대하여 모두 부인한다"면서 "원고가 주장하는 청구 원인 사실 자체가 명확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이를 확인할 구체적인 증거도 제출되지 않아 피고들이 자세한 답변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결국 양측의 조정은 불성립됐고, 본재판에 가있는 상태다.
삼성 측은 소송과 관련한 시사저널 질의에 "이건희 선대회장님의 개인적인 수집품이기 때문에 구체적은 취득 과정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만 짧게 답했다.
시사저널은 손씨의 숙부 중 손재형 선생의 차남인 손홍씨에게도 문자메시지를 통해 관련 사실에 대해 질의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 다만 손홍씨는 지난해 조카 손원경씨의 기자회견 직후 문화일보에 "(손원경씨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며 "적법하게 《인왕제색도》가 매매됐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으나 집안 내 벌어진 일을 두고 어디에 대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겠느냐"고 입장을 밝혔다.
손원경씨가 제기한 소송을 통해 《인왕제색도》 소유권은 가려질 수 있을까. 법조계에선 손씨의 소유권 주장이 워낙 오래전 일이고, 관련자 다수가 사망하는 등의 상황으로 인해 입증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로선 당시 손씨 일가와 삼성 일가의 거래에서 생존하는 인물이 손씨의 숙부 손홍씨 등이 거의 유일한 상황인데, 손홍씨가 《인왕제색도》 매매가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를 뒤집을 만한 근거를 찾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형편이다.
■손재형 선생 장손 "요구한 건 그저 삼성 측의 설명"
시사저널은 《인왕제색도》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고(故)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장손인 손원경씨를 4월13일 만나 소송을 제기한 이유 등에 대해 들었다.
뒤늦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이유는 뭔가.
"그간 집안에 여러 일이 있었다. (《인왕제색도》 문제도) 언젠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금방 흘렀다. 별개로 삼성에서도 여러 일이 지속적으로 있었고, 그러다 《인왕제색도》 등 이건희 회장의 유품들을 기증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기자회견 이후 소송까지 제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의혹의 지점들이 있으니 기자회견을 연다면 삼성 측과 대화를 통해 어떤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전혀 없었다. 한 달간 기다리다 3월에 내용증명을 보냈고, 이후로도 답이 없어 4월에 소를 제기한 거다. 소 제기 이후에도 이 사실을 외부에 밝히지 않고 삼성 측에 협의를 요청해 왔다. 제 의도를 곡해하는 시각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제게 필요했던 건 그저 삼성 측의 설명이었다는 점이다."
삼성 측은 원고(손씨)의 주장이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증거가 꽤 있다. 조부의 유품들을 뒤지고 뒤져서 증거를 계속 수집해 왔으며 조만간 법정에서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공개할 계획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깨달음을 얻은 게 있다. 이 일을 겪고 또 조부의 여러 자료를 뒤지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우리나라의 문화재나 미술품들의 가치가 재평가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유권 분쟁도 그 계기 중 하나가 됐으면 한다. 주변에선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지만, 그게 내 권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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