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마약 음료 사건은 테러” 하이브리드 마약 범죄를 막아라
(시사저널=조해수 기자)
4월2일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무료 시음회를 가장해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를 나눠준 사건이 발생했다. 불특정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사상 초유의 충격적인 범죄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건 보도 직후 "검경은 수사 역량을 총동원해 마약의 유통·판매 조직을 뿌리 뽑고 범죄수익을 끝까지 추적해 환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검찰 377명, 경찰 371명, 관세청 92명 등 전담 인력 840명으로 구성된 '마약 범죄 특별수사본부'가 출범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국가 전체의 마약·조직 범죄 대응 역량을 회복할 수 있도록 대검찰청에 가칭 '마약·강력부'를 조속히 부활시키겠다"고 밝혔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마약 음료 협박 사건은 대한민국의 미래 주역인 학생들을 노렸다는 점에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테러와 같은 범죄"라며 "불퇴전(不退轉)의 각오로 마약 범죄와의 전면전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마약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4월10일 마약 음료 제조·전달책과 번호조작책인 20대 남성 길아무개씨와 30대 남성 김아무개씨가 각각 마약류관리법 위반,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길씨는 범행에 쓰인 마약 성분이 든 음료 100병을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직접 제조한 후 사건 당일 퀵서비스와 고속버스를 이용해 시음 행사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전달했다.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 100병 나눠줘
김씨는 마약 음료를 마신 학생들의 학부모에게 협박전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휴대전화번호 변작 중계기를 설치·운영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전화번호를 변작해 주는 전문업자다. 김씨는 인천에서 검거됐는데 노트북 6대, USB 모뎀 96개, 휴대전화 유심 368개 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분석한 결과 김씨는 피해금액 1억원가량의 보이스피싱 14건에 연루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김씨가 여러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부터 약 2000만원을 받아 이 가운데 절반가량을 장비 구입에 쓴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는 "전화번호 1개를 변작해 주는 대가로 1만원씩 받았다"면서 "길씨와는 모르는 사이며, 보이스피싱 범죄에 쓰이는 것으로 알았다"며 마약 음료와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 강남구청역·대치역 인근에서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를 직접 나눠준 아르바이트생 4명 가운데 20대 김아무개씨는 과거 현금 수거책으로 보이스피싱 수십 건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연루된 인물 상당수가 보이스피싱 조직과 직간접 연결된 점, 협박전화 발신지가 중국인 점 등을 토대로 중국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의 신종 범죄로 결론 내렸다. 특히, 피해 고등학생들의 부모를 협박할 때 조선족 말투가 나오는 바람에 일찌감치 경찰의 의심을 샀다.
이에 따라 구인구직 사이트에 시음 행사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광고 글의 IP(인터넷주소),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범행을 지시한 카카오톡 아이디, 이들에게 일당을 지급한 금융계좌 등을 추적해 중국 윗선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 국적의 20대 이아무개씨와 중국 국적 30대 박아무개씨 등이 바로 그들이다. 다른 사건으로 경기도 수원중부경찰서에 검거된 중국 국적 남성 A씨로부터 길씨에게 마약을 전달하도록 지시한 인물이 이씨라는 증언도 확보했다.
이씨는 국내에서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전력이 있으며, 지난해 10월 출국해 중국에 체류 중이다. 길씨는 경찰에서 "친구 이씨 지시로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음료를 제조한 후 고속버스와 퀵서비스를 이용해 서울로 보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이씨 등이 국내 공범들에게 범행을 지시하고 마약 음료 제조용 빈병과 상자·판촉물을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보이스피싱+마약…하이브리드·지능화된 범죄
이에 따라 서울중앙지법은 4월12일 이씨와 박씨 등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이들이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만큼 여권 무효화 조치와 함께 중국에 국제 공조수사 요청을 할 예정이다.
그러나 체포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이씨와 박씨조차 중국 내 '보이스피싱 콜센터' 조직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재발 방지를 위한 범죄조직 발본색원은 더욱 요원해 보인다. 경찰은 IP 추적 등을 통해 이씨와 박씨가 소속된 중국 내 콜센터 위치를 찾아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사기를 기반으로 했던 보이스피싱이 마약 범죄와 융합했다는 점에서 수사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몰래 마약을 먹이는 소위 '퐁당 마약' 수법이 보이스피싱과 결합해 '하이브리드 범죄'가 탄생한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갈수록 범죄가 지능화돼 가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마약 음료 범죄자들은 대포폰과 텔레그램 메신저를 이용하며 신상을 감추고 경찰의 추적을 피했다. 해외에 있는 윗선의 전화번호를 국내 번호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중계기를 이용해 번호도 변작했다. 비대면 온라인을 활용한 초국경 형태의 범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
범죄가 성공할 경우, 추적이 힘든 '골드바'로 돈세탁을 한다. 암호화폐나 대포통장을 활용하는 방식도 많이 쓰인다. 이를 막기 위해 경찰은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 신고·대응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센터는 보이스피싱과 관련한 범정부 통합 대응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금융감독원,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등으로 흩어진 신고와 상담 창구를 일원화하는 게 핵심이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 2월 민·당·정 협의회에서 "보이스피싱은 통신·금융기술을 악용해 수법이 계속 진화하는 만큼 해외에 소재한 몸통 조직을 와해하지 않으면 피해가 언제든 증가할 수 있다"면서 "보이스피싱에 더욱 신속하고 전문적으로 대응하도록 통합신고대응센터 설치와 통신사기피해 환급법 개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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