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스토리] 범상치 않은 비율로 슈트계 평정한 ‘톰 브라운’의 치명적 매력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랄프 로렌이었다면 2000년대의 그것은 단연 톰 브라운이다. 과거 남성 슈트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돌체앤가바나 등 이탈리아 브랜드가 트렌드를 주도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크리스챤 디올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가 슬림한 남성 슈트로 유행을 이끌었다. 당시 디올 옴므 슬림 슈트의 매력은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이던 칼 라거펠트가 몸무게를 무려 43kg이나 감량하게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랄프 로렌, 토미 힐피거, 브룩스 브라더스 등 미국 패션계를 이끌던 브랜드들은 그때도 꾸준히 활동성을 강조한 남성 슈트를 내놨다. 그러던 2006년 톰 브라운이 파격을 선보였다. 길이가 짧은 재킷과 재킷 소매 아래로 삐져나온 화이트 셔츠의 소맷 부리, 발목이 드러나는 턱 없는 팬츠, 슬림 핏 그레이 슈트가 그것. 보이지 않는 양말과 구두도 곁들였다. 이것이 바로 톰 브라운의 시그너처다. 톰 브라운 슈트는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남성 스타일로 꼽힌다.
톰 브라운은 클래식하다
미국 인디애나주 노트르 데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톰 브라운은 9개월간 컨설팅 분야에서 일했지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실 그의 꿈은 배우였다. LA의 촬영 현장 제작 지원 스태프로 일하며 배우 협회에 등록했으나 1997년 꿈을 접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톰 브라운은 함께 살던 친구가 운영하던 패션 브랜드 매장을 방문한다. 친구가 빈티지 의류로 실험하는 모습에 영감을 받아 종종 빈티지 의류를 재가공하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에 관심이 생겼고, 패션에 대한 열정이 있음을 깨닫는다. 톰 브라운은 자신의 낡은 블레이저 재킷을 건조기에 넣어 수축해 보기도 했다고 한다.2004년 기성복 라인을 출시하고, 2006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공식 론칭한 톰 브라운은 시그너처 슈트를 직접 입고 뉴욕 곳곳을 누볐다. 이는 요즘처럼 인스타그램 마케팅이 성행하기 전 시도한 참신하고 획기적인 방식의 홍보였다. 이후 그는 2006년, 2013년, 2016년 총 3회에 걸쳐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로부터 올해의 남성복 디자이너 상을 받았다. 2010년 톰 브라운은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과 협업해 샴브레이 소재의 클래식한 옥스퍼드 셔츠를 제작했다. 스케이트 스타 제이슨 딜이 평생 입지 않을 것만 같던 클래식한 셔츠를 입고 룩북을 촬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율로 센세이션 일으킨 슈트
2000년 초만 해도 톰 브라운의 파격적인 슈트 길이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벨트 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싱글 브레스트 투 버튼 재킷과 재킷 소매 아래로 비죽 나온 화이트 셔츠 커프스, 발목이 드러나는 기장의 그레이 슈트 팬츠, 그레이 쇼츠 슈트에 무릎까지 올린 그레이 삭스까지 톰 브라운은 그레이 컬러뿐만 아니라 일관성 있는 그만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무릎 위 그레이 쇼츠는 1950~60년대 남학생 교복에서 영감을 얻었다. 슈트에 대부분 양말을 신지 않도록 하는 것도 톰 브라운 룩의 특징 중 하나다.
2009년 봄여름(F/W) 시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남성복 박람회 '피티 우오모(Pitti Uomo)'에서 톰 브라운은 똑같은 헤어스타일의 모델 40명이 똑같은 슈트를 입고 타자기 앞에 앉아 기계적으로 타자를 치는 모습을 연출해 눈길을 끌었다. 톰 브라운의 메인 아이템인 슈트는 '유니폼' 개념이 강하다. 이는 1950~60년대 미국의 회색 슈트의 영향으로 모두가 동일한 모습으로 동조하는 미국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톰 브라운은 클래식한 그레이 슈트에 '비율'이라는 흥미로운 변주를 더해 남성복 패션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톰 브라운은 '슈트 착용법' 매뉴얼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제시한다. 이는 소비자가 구매 당시 원하던 핏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슈트 착용법의 한 예로 톰 브라운 바지를 착용할 경우, 벨트를 하지 않고 양말도 신지 않기를 권장한다. 꼭 양말을 신어야 하면 솔리드 검은색을 선택할 것! 바지 기장은 복숭아뼈가 보이도록 올릴 것!
‘스트라이프'와 '그레이' 컬러
톰 브라운을 상징하는 패턴은 스트라이프다. 두 종류의 상징적 스트라이프 패턴이 있다. 4개의 흰색 스트라이프를 가리키는 포-바 시그너처(Four-Bar Signature)는 상의 아이템의 왼쪽 소매에 들어가고, 빨강·흰색·파랑 3색 스트라이프는 상의 뒷목과 팬츠의 요크 부분에 들어간다. 빨강·흰색·파랑 3색 스트라이프는 트리콜로라고도 한다. 트리콜로는 3가지 색상을 뜻한다. 한 매체 인터뷰에서 톰 브라운은 세 가지 컬러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본인이 좋아하는 색이라고 말했다. 톰 브라운을 상징하는 컬러는 그레이 컬러로 변함없이 가장 중립적이고 모던한 컬러다.톰 브라운을 입은 스마트폰
톰 브라운이 진행한 가장 상징적인 협업은 미국의 전통을 고수하는 클래식한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와 컬래버레이션한 '블랙 플리스(검은 양)'다. 미국에서는 흔히 변종, 유별난 것을 '검은 양'이라고 하는데, 블랙 플리스는 브룩스 브라더스 같은 정통 클래식 브랜드와 전통을 깨는 톰 브라운 브랜드의 만남을 잘 표현해낸 이름이다. 이 협업은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됐다. 브랜드 몽클레어와 협업한 '몽클레어 감마 블루'는 스포츠웨어와 밀리터리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컬렉션으로 톰 브라운의 캐주얼한 라인을 선보였다. 이 협업은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진행됐다. 바니스 뉴욕과 컬래버레이션한 '톰 그레이'는 아이비리그 프레피 룩의 후드 점퍼와 셔츠 같은 캐주얼한 아이템으로 20대를 공략한 캡슐 컬렉션이다. 톰 브라운 메인 라인의 시그너처 룩인 빨강·흰색·파랑 3색 스트라이프 대신 회색, 흰색, 검은색으로 이뤄진 테이프를 사용한다.‘톰돼지'에서 '신명품'으로 재도약
2011년 삼성물산은 톰 브라운과 국내 독점 판매 계약을 맺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자 삼성물산이 운영하는 세계 3대 편집 숍 '10 꼬르소 꼬모'에 톰 브라운을 입점했다. 톰 브라운은 2010년대 초반까지 지드래곤이 선택한 브랜드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톰 브라운의 시그너처인 팔 부분에 넣는 단순하면서도 클래식한 스트라이프와 빨강·흰색·파랑 3색 스트라이프는 누구라도 쉽게 모방할 수 있는 패턴이었다. 2010년대 중반 국내에서 톰 브라운의 시그너처 스트라이프를 따라 한 모조품이 성행했고, 더는 톰 브라운 스타일이 신사의 상징이 아니었다.2016년 휴대폰 가게 직원이 행인을 강매에 가깝게 가게 안으로 억지로 끌고 가는 장면이 뉴스에 보도돼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이 직원은 당시 톰 브라운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이후 인터넷에서는 "저 브랜드, 폰팔이가 많이 입는다"는 반응이 이어졌고, 그 때문에 톰 브라운은 '양아치' '톰돼지'라는 단어가 자동완성으로 뜰 정도로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했다. 게다가 10대와 20대의 명품 소비 증가로 이른바 일진(무리 지어 다니는 청소년들)이나 나이 어린 사회 초년생이 유니폼처럼 찾는 브랜드가 됐다. 대중은 너무 흔해진 톰 브라운의 시그너처를 보며 가짜일 것이라고 암묵적 무시의 눈길을 보냈다.
이는 1990년대 영국의 차브족이 버버리 야구모자와 프라다 검은색 운동화를 착용하면서 브랜드의 이미지를 추락시켰고, 정품이 아닌 가품을 구매해 매출마저 하락시킨 것과 같은 현상이다. 당시 버버리는 버버리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바 체크 패턴의 야구모자 생산을 중단했으며 프라다도 영국에서 검은색 운동화 판매를 중단했다. 반면 톰 브라운은 2020년 삼성전자 스마트폰에 톰 브라운의 디자인을 결합한 '갤럭시Z플립 스페셜 에디션'을 선보이면서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었다. 또한 BTS가 톰 브라운의 의상을 입고, 톰 브라운과 협업한 갤럭시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브랜드 위상도 높아졌다.
2021년 기준으로 톰 브라운은 전 세계 40개국에 350개 매장을 뒀다. 서울·뉴욕·런던 등 주요 도시에만 52개 직영점이 있으며, 프랜차이즈 매장도 38개에 이른다. 지속적으로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며 2021년 싱가포르와 대만에 매장을 열고, 2022년 10월 중국 티몰에 공식 온라인 플래그십 스토어를 론칭했다. 삼성물산에 따르면 2021년 매출이 전년보다 47% 증가한 2억6300만 유로(약 3580억 원)를 기록했다. 2019년과 비교하면 64% 늘어 코로나19 사태 이전 매출을 뛰어넘었다. 2022년 1~8월 기준 톰 브라운 매출은 2021년 동기 대비 20% 늘었다. 업계에 따르면 톰 브라운은 올해 7월 100% 자회사인 톰 브라운 코리아를 설립하고 한국에 직접 진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톰돼지'에서 MZ세대에게 각광받는 '신명품'으로 회생한 건 분명하지만 이대로 꽃길만 갈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이지현 서울디지털대 패션학과 교수
Copyright © 신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