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희생이 흩어질까… 다시 손을 꼭 쥐어봅니다[주철환의 음악동네]
영화 ‘1917’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배경이다. 샘 멘데스 감독은 끝부분에 참전용사 중 한 사람(알프레드 H 멘데스)의 이름을 콕 집어서 경의를 표했다. 손자에게 창작의 영감을 준 영국 중사 알프레드는 전쟁의 참혹한 상처를 자막 한 줄로 치유 받은 셈이다. 그 어떤 훈장보다 값진 봉헌이었다.
영화 ‘1917’은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투 장면보다 잠깐의 휴식 중 한 병사가 동료에게 둘러싸여 부르는 애잔한 민요가 여운을 남긴다. ‘나는 가련한 길손입니다’(I am a poor wayfaring stranger)로 시작해서 ‘이제 요단강 건너 집으로 갑니다’(I’m only going over Jordan I’m only going over home)로 끝나는 노래다. 생사를 넘나들며 가까스로 거기까지 이른 주인공 병사(조지 매케이)의 넋 나간 표정과 숲에서 나와 다시 전쟁터로 향하는 부대원들의 발걸음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도 싶지만 지금 팝콘을 먹으며 누리는 평화로운 극장의 여유가 사실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은 선물일 수도 있음을 알아챈 관객이 몇이나 될까.
제1차 세계대전에 한국인이 참전했다면 믿겠는가. 더구나 그 병사가 죽은 지 10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건 진짜로 드라마 같은 현실이다. 지난주 월요일(4월 10일) 오전 9시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선 특별한 봉환 행사가 열렸다. 뉴욕에서 출발한 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태극기로 덮은 관이 내려왔고 국방부 의장대는 ‘받들어 총’으로 예를 갖췄다.
그날 뉴스에는 화면마다 고 황기환 지사(1886∼1923)의 흑백사진과 함께 탤런트 이병헌의 얼굴도 등장했다. 무슨 사연인가. 고인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 tvN) 주인공(유진 초이)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생긴 일이다. 실은 큰 줄기에서 비슷할 뿐 세세한 고증까지 맞춘 흔적은 없지만 자칫하면 묻힐 뻔했던 영웅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공로는 적지 않아 보인다. 1904년 증기선을 타고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한 그는 1918년 5월 미군에 자원입대했다. 종전 후 유럽에 남은 황 지사는 한국어와 영어 능력을 바탕으로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대표단 사무를 도왔고 프랑스, 영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독립선전 활동을 벌였다.
‘100년 만의 부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또 있다. 황 지사는 뉴욕에서 순국 후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를 찾아내 세상에 알린 건 뉴욕 한인교회 목사 장철우였다. “당신은 왜 죽은 사람을 찾아다니느냐.” 그의 응답이 감동적이다. “광산에서 금덩어리를 찾거나 바닷가에서 진주를 찾는 것보다 고독한 애국의 혼을 찾는 것이 귀한 일 아닌가.”
음악동네에서 역사 공부가 좀 길었다. 그날 공항에서 의장대가 준비한 트럼펫 연주곡은 드라마 삽입곡 ‘좋은 날’(원곡 멜로망스)이었다. ‘숨길 수 없는 게 멈추지 않는 게 어디 눈물뿐일까. 길고 긴 이야기 춥고 슬픈 얘기 끝에 그대와 안고 있길 흩어져 버릴까 꼭 쥐어봅니다.’ 날이 날인지라 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 가사도 흥얼거려본다.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은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
황 지사를 찾아낸 건 묘비에 두 개의 언어가 병기돼 있어서라고 장 목사는 밝혔다. (한글로 ‘대한인 황기환지묘’ 영어로 ‘Born in Korea Died April 18, 1923’) 뜻깊구나. 내일은 2023년 4월 18일. 100년의 고독한 잠을 깨고 마침내 그는 우리 곁에 왔다. 날씨가 늘 맑다면 햇살에 감사할 리 없다. 좋은 날은 궂은 날을 견뎌봐야 절감할 수 있다. 1940년 지미 데이비스가 부른 ‘유 아 마이 선샤인’에 이미 그런 지혜가 담겨 있다. ‘하늘이 흐릴 때 그대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죠.’(You make me happy when skies are gray)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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