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달린 의료 사고 사망 통계[몸의 정치경제학]
다만 약에서 구하옵소서 시리즈 5
미국질병관리센터(CDC) 공식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의료 사고로 인한 사망은 매년 25만 명에 달한다. 지난 2월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으로 인한 사망이 5만 명 수준이었으니 5배에 달하는 인명이 한 나라의 의료 사고로 희생되는 셈이다.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에 대한 전 세계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지만 매년 25만 명의 목숨이, 그것도 한 나라의 의료 현장에서 희생된다는 것에 대한 세간의 충격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한편 ‘환자안전저널(Journal of Patient Safety)’의 또 다른 연구는 미국 병원에서 ‘예방 가능한 의료 사고(PME)’로 인한 사망자 수가 연간 44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는 ‘예방 가능한 의료 오류로 인해 매년 미국 병원에서 21만 명에서 44만 명의 환자가 사망하는 것은 냉혹한 현실(2017년 9월 19일)’이라며 담담한 톤으로 보도했다. 그러면서 57%에 달하는 19만 명의 간극에 대한 해설은 편리하게 생략한다. 마치 냉동하고 흡착 패드까지 붙인 포장육처럼 노련하게 건조된 수치들만 나열한다. 선혈이 새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다른 통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의료 영역에서의 통계는 입김 센 집단의 이해와 결심으로 굳어진다. 의료 통계가 이렇게 주관적으로 휘청이니 믿지 말자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휘청임을 관찰하면 숫자 뒤에 감춰진 더 많은 것들, 사실 뒤에 드리워진 더 큰 진실들을 읽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의료 사고 사망에 대한 국가 기관의 편향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9년 영국의학저널(BMJ)의 한 연구는 의료 과실·사고로 인한 캐나다 내의 사망이 연간 1만2000명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캐나다환자안전연구소(CPSI)는 2016년 한 연구를 인용해 예방 가능한 사고로 인한 사망은 매년 2만4000명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장기 요양 시설에서 발생하는 수를 더하면 심장 질환과 암에 이어 셋째로 큰 사망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영국은 더 심한 진폭을 보인다. 2018년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의 한 보고서는 의료 사고로 인해 영국에서 매년 5700~9000명이 사망한다고 추정했다. 그런데 NHS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당시 제레미 헌트 영국 보건부 장관은 그 수치가 연간 2만2000명 정도라며 NHS의 발표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스페인에서도 국립의료시스템(SNS)은 매년 2000여 명인 반면 스페인환자안전학회는 매년 1만5000~2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엘파이스신문이 보도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연간 5000명의 사망을, 반면 2016년 ‘환자안전저널(Journal of Patient Safety)’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1만7000명으로 추정됐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보건 의료를 담당하는 국가 기관은 사망 수치를 최대한 낮게 측정하고 문제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반면 환자 안전 관련 단체나 연구 집단은 훨씬 많은 사망 수치를 제시한다. 최소치와 최대치의 간극은 단순히 숫자나 조사 방법의 차이가 아니라 문제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직결돼 있다.
초점은 보라색과 노랑색의 거대한 편차 그 자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정부 기관들은 왜 최소 추정치를 고집하는지, 그런 접근법이 과연 의료 사고에 따른 사망과 피해 축소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핵심이다.
각종 집회나 시위가 벌어지면 주최 측의 추산과 경찰 측의 추산에서 통상 몇 배 정도의 차이가 벌어진다. 주최 측은 규모와 영향력을 최대한 부풀리고 치안 측은 규모와 의미를 가급적 축소하고자 하는 이해의 갈림이 만들어 낸 희극의 통계이자 ‘불치성 주관화’ 증상이다.
그렇다면 의료 사고로 인한 사망을 최소 추정치로 설정하는 보건 의료 당국의 경향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행정 당국의 이해와 관심이 피해 환자나 의료 사용자 쪽이 아니라 의료업계 쪽으로 쏠려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할까. 의료 보건이라는 공공 영역에서 국가 기관의 편향은 허용될까.
의료 사고 축소 보고와 의료 재앙
의료 사고 사망 추정치들이 이처럼 큰 격차를 보이는 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위에서 언급한 당사자들 간의 이해 충돌이다. 둘째는 추정치의 기초가 되는 의료 사고 보고의 부정확성 문제다.
달리 말해 의료 사고 보고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사고에 따른 사망 추정치의 정확도가 확연히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의료 사고에 대한 보고가 왜 정확히 이뤄지지 않느냐는 것인데 전문가 다수는 업계에 만연한 ‘축소 보고’ 관행을 지목한다.
그렇다면 왜 의료 사고 축소 보고는 지속될까. 의료업계 내부 요인부터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오류·사고 발생에 대한 환자와 가족의 인지 및 판단 능력 부족. 둘째, 내외적으로 복잡한 보고 절차와 시스템에 따른 부담. 셋째, 감당해야 할 각종 법적·직업적 처벌과 평판 손상에 따른 불이익을 들 수 있다.
한편 축소 보고를 조장하는 외부 환경과 조건도 무시할 수 없다. 첫째, 의료 인력 양성 과정에 결여된 윤리 및 책임 교육. 둘째, 업종 내 팽배한 보고 의무 경시 문화. 셋째, 정확한 보고를 강제할 법적·제도적 장치 미비가 그것들이다.
하지만 의료 현장 인력들이 가장 큰 장애물로 지목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의료 사고인지 개념적·기술적으로 통일된 기준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에따라 오류·위해·과오·과실에 대한 객관적 분별이 쉽지 않고 결국 책임성의 범위 또한 모호해진다는 주장이다. 굳이 현장 경험이 없더라도 이런 논리적 주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의료 사고에 대한 보편적 정의와 분류 부재→기관·조직·지역·나라별 편차 극심
②의료 사고 보고 내용과 체계 표준화 부재→통계적 일관성 확보 및 대조 대비 불가
③개선을 위한 의료적·행정적·법적 개입의 기준 설정 난관
여기 제시된 개념적·기술적·제도적 장애물들이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난관들이 의료 사고의 빈도와 심도의 축소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보건 의료 정책에 정통한 헬스 어페어스(Health Affairs)는 ‘의료 서비스 제공자·병원·제약 회사는 소송·규제 조치·평판 손상을 우려해 사고 보고를 꺼린다’며 의료 사고 감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의료 산업 자신이라고 일갈한다. BMJ 최근 논문도 현장에 만연한 ‘비난과 수치의 문화 그리고 처벌에 대한 공포’가 의료 사고 보고를 억제하고 환자 안전 개선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의료 사고 축소 보고는 언뜻 들으면 단순 통계 정확성이나 직업 윤리 문제처럼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표2>에서 알 수 있듯이 의료 사고 축소 보고→사고 빈도·도 측정 불가→의료 사고에 대한 업종 내 사회적 방치→공적 개입 및 제도적 장치 부재→사고 발생 증가→환자·시민 피해 확대로 귀결되는 악순환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표2>: 의료 사고 악순환의 구조
그런 의미에서 축소 보고된 의료 사고 통계와 이를 조장 또는 방관하는 행위야말로 의료 재앙의 뇌관인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축소된 통계는 임박한 재앙에 둔감해지게 하는 마력까지 지녔다. “통계는 비키니와 같다. 그것이 보여주는 바는 자극적이지만 그것이 감추는 내용이 훨씬 핵심적”이라고 말한 에론 레벤스타인의 통찰이 주효한 대목이다.
의료 사고와 사망에 관한 통계의 부정확성은 자못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그 부정확성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사회적 관심과 압박이 미약하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미국·캐나다·영국·일본·스페인 등에서 벌어지는 의료 사망 추정치를 둘러싼 논란과 경합이 오히려 부럽다. 그것이 단순히 통계의 정확성 문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우선순위와 의지들의 격돌을 뜻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중 보건 데이터에 정통한 한스 로슬링은 “통계는 사회의 희망·두려움·열망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고 말했다. 지금이 의료 사고 통계의 사회적 재건축을 결심할 적기다.
최정봉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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